우리는 재무계획을 만든다고 하면, 인생의 '로드맵'을 만들려고 한다.
앞으로 1년, 3년, 10년. 어느 시점에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계획이 얼마나 촘촘한지,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따지며 미래를 미리 점령한 듯한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착각이다.
로드맵이라는 말에는 암묵적으로 '미래는 통제 가능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삶은 지도 위의 선처럼 단순하지 않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 마음의 변화, 환경의 요동 속에서 우리의 계획은 수없이 수정되고, 흔들리고, 때론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계획은 미래를 정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미래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나침반에 가까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지켜야 하는 규칙"으로 생각한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고, 한 달에 얼마를 저축하고, 몇 살까지 얼마를 모아야 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항목들은 우리를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더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규칙은 지키지 못하면 스스로를 책망하게 만든다. 조금만 어긋나도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식의 계획은 오히려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계획은 규칙이 아니라 방향이다. 계획은 내가 가고자 하는 쪽을 가리키는 방향성의 언어이지, 나를 몰아세우는 시간표가 아니다. 우리가 세우는 계획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내 삶이 흐르는 리듬과 감정, 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정될 수 있어야 한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배를 떠올려보자.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로 가야 육지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있다. 그러다 기적처럼 무전기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단 하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다."
그런데 방위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면?
그럴 땐 정교한 용어나 정확한 좌표보다 중요한 게 있다. 해가 어디에 떠 있는지, 언제쯤부터 표류하고 있었는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나의 위치는 어느 정도 파악된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바늘과 그림자, 별자리를 이용해 좀 더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돈이라는 망망대해 위에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왠지 가라앉을 것같은 불안감에 어느쪽인지 모르고 전력을 다해서 노를 젓고 있다. 다만 이 흐름이 "부자라는 섬"에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이제 기적의 무전기 같은 재무설계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이 설계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말 역시 같다. "나의 지금 위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지점이자,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일 때 판단의 근거가 되는 고정된 값이다. 돈의 영역에서 기준점은 단순히 목표 금액이나 저축률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원칙이다.
기준점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주변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요즘 부동산이 올라서..." 하거나 "이 주식은 확실히 오를 거야"라고 말할 때, 나는 내 기준점으로 돌아가 묻는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인가?"
로드맵은 선형적 사고의 산물이다.
A에서 B로, B에서 C로, 마치 계단을 오르듯 단계적으로 발전한다는 믿음. 하지만 삶은 그렇게 직선적이지 않다. 때론 옆으로 가야 하고, 때론 뒤로 물러서야 하며, 때론 완전히 다른 길로 빠져야 할 때도 있다.
재무계획도 마찬가지다. "30살에 1억, 40살에 5억, 50살에 10억"이라는 목표는 겉보기엔 명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무 많은 변수를 무시한다. 소득의 변화, 가족 상황의 변화, 건강의 변화, 경제 환경의 변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로드맵을 흔들어놓는다.
더 큰 문제는 로드맵에 집착하다 보면 현재를 놓친다는 것이다. 미래의 목표에만 매달려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기회를 외면하게 된다. 로드맵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재를 볼모로 잡는다.
기준점은 목적지가 아니라 원칙이다.
로드맵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라면, 기준점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기준점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내적 나침반이다.
예를 들어 "매월 200만원을 저축한다"는 로드맵의 한 항목이라면, "수입의 20%는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기준점이다. 로드맵은 구체적이지만 융통성이 없고, 기준점은 유연하지만 일관된 방향성을 제공한다.
기준점이 있으면 상황이 바뀌어도 대처할 수 있다. 수입이 줄어들면 저축액도 줄어들지만, 비율은 유지된다. 수입이 늘어나면 저축액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기준점은 나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한다.
재무적 현재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단순히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경제적 지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첫 번째, 자산과 부채. 지금 내가 가진 것과 빚진 것의 정확한 현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의 정확성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것이다. 예금, 적금, 주식, 펀드, 부동산, 그리고 대출금, 카드빚, 할부금까지. 이 모든 것이 내 재무 지형의 일부다.
두 번째, 현금 흐름.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의 패턴이다. 월급만이 아니라 용돈, 부업 수입, 이자 수입까지. 그리고 고정비, 변동비, 저축, 투자까지. 이 흐름을 이해해야 내가 어떤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세 번째, 재무적 습관과 패턴.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돈 쓰는 습관, 저축하는 방식, 투자에 대한 태도까지. 이것들이 내 재무 상태를 만들어온 진짜 요인들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만으로는 전체 이야기를 알 수 없다.
통장에 1000만원이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상황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 용돈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꿈을 위해 모은 종잣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안감에 움켜쥔 안전장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감정과 함께 존재하는가다. 급여에서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적금과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모은 돈은 같은 액수라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부채도 마찬가지다. 투자를 위한 대출과 생활비를 위한 카드빚은 같은 '빚'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하나는 미래를 위한 레버리지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결핍이 만든 그림자다.
돈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정보다.
불안한가, 만족스러운가, 답답한가, 자유로운가. 월급날의 기분, 통장을 확인할 때의 느낌, 큰 지출을 할 때의 마음. 이 모든 감정들이 내 재무 상태의 일부다.
어떤 사람은 통장에 1억이 있어도 불안하다.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조급함이 그를 지배한다. 어떤 사람은 100만원만 있어도 여유롭다. 돈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평안을 준다.
재무설계는 숫자를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감정을 건강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줄어들고, 돈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없어지며,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것이 진정한 재무 건강이다.
"10억을 모으겠다"는 목표다. "경제적 자유를 얻겠다"는 가치다.
목표는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지만, 외부의 기준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 남들이 10억을 모으니까, 책에서 10억이 기준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10억이 목표가 된다. 하지만 정작 내게 10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필요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치는 다르다. 가치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나온다. 경제적 자유라는 가치는 돈에 종속되지 않는 삶,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삶,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한다. 이 가치를 위해서라면 10억일 수도 있고, 1억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금액이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가치 중심의 재무설계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는다.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향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선택이 필요하다.
안정을 택할 것인가, 성장을 택할 것인가. 현재의 만족을 택할 것인가, 미래의 풍요를 택할 것인가. 자유를 택할 것인가, 안전을 택할 것인가. 이런 선택들 앞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우선순위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20대의 우선순위와 40대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변화조차 내 가치관 안에서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가족의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사람이라면, 20대에는 안정적인 직장과 보험에 집중하고, 30대에는 내 집 마련과 자녀 교육비에 집중하며, 40대에는 노후 준비에 집중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행동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재무 철학은 내가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다.
어떤 사람은 "돈은 모으는 것"이라는 철학을 갖는다. 소비보다는 저축을, 지출보다는 수입을, 현재보다는 미래를 중시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안정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어떤 사람은 "돈은 쓰는 것"이라는 철학을 갖는다. 저축보다는 경험을, 미래보다는 현재를, 절약보다는 투자를 중시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어떤 사람은 "돈은 도구"라는 철학을 갖는다. 돈 자체보다는 돈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선택의 여지를 중시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철학이 바로 기준점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망설일 때, 내 철학으로 돌아가 묻는다. "이것이 내 철학에 맞는 선택인가?"
재무설계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단계별로 접근해야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생존 기준점'이다. 월 생활비의 3~6개월분 비상금을 확보하는 것. 이것은 경제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 단계에서는 수익률보다는 안정성이 중요하다.
두 번째 단계는 '안정 기준점'이다.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는 수준. 여기서는 저축과 투자의 균형이 중요하다. 너무 보수적이어도, 너무 공격적이어도 안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성장 기준점'이다. 경제적 여유가 생겨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준. 이 단계에서는 투자 비중을 늘리고, 더 다양한 자산 클래스를 고려할 수 있다.
각 단계마다 다른 기준점을 적용하되, 전체적인 방향성은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기준점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정되고 진화해야 한다.
인생의 단계가 바뀌면 기준점도 바뀐다. 결혼, 출산, 이직, 부모님 봉양 등의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기준점을 재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조정은 임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내 핵심 가치와 철학에 기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시장 상황의 변화도 기준점 조정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금리가 크게 오르거나 내릴 때, 부동산 시장이나 주식 시장에 큰 변화가 있을 때. 하지만 이런 외부 변화에 따른 조정은 신중해야 한다. 너무 자주 바꾸면 기준점의 의미가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조정의 원칙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기준점을 재검토할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조정할 것인가"에 대한 나만의 룰을 만들어두자.
완벽한 계획은 없다. 있다고 해도 지킬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재무설계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모든 가능성을 대비하고, 최적의 수익률을 추구하는 계획. 하지만 이런 계획은 대부분 실패한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엄격하며,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80점짜리 계획을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100점짜리 계획을 한 번 실행하고 포기하는 것보다 낫다. 재무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이다. 내가 평생 지킬 수 있는 원칙과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계획의 특징은 단순함이다. 복잡한 상품보다는 간단한 상품을, 복잡한 전략보다는 단순한 전략을 선택한다. 이해하기 쉽고, 관리하기 쉬우며, 지키기 쉬운 원칙을 세운다.
융통성 없는 일관성은 고집이고, 일관성 없는 융통성은 변덕이다.
재무설계에서도 이 두 가지의 균형이 중요하다. 상황이 바뀔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되, 핵심 원칙은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수입의 20%는 저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면, 이것은 일관되게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20%를 어떤 형태로 저축할지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할 수 있다. 금리가 높을 때는 예금 비중을 늘리고, 주식 시장이 좋을 때는 투자 비중을 늘리는 식으로.
융통성과 일관성의 균형점을 찾는 방법은 "원칙은 고정하되, 방법은 유연하게"라는 것이다. What은 바꾸지 않되, How는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실패는 계획의 종료가 아니라 조정의 신호다.
재무설계를 하다 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생긴다. 저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투자에서 손실을 보거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거나.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계획이 틀렸다"며 포기해버린다.
하지만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니다. 실패는 현실과 계획 사이의 괴리를 알려주는 소중한 정보다. 실패를 통해 내 계획의 맹점을 발견하고, 내 성향을 더 정확히 파악하며, 현실적인 기준점을 다시 설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다. 왜 실패했는지, 어떤 부분이 비현실적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를 차분히 분석한다. 그리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더 나은 기준점을 만들어간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 실패하지 않는 재무설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력을 기르는 것이다.
재무설계는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남의 성공 사례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맥락에서 나만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돈의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기준점이 필요하다. 그 기준점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내 가치관, 내 상황, 내 꿈에 기반한 나만의 기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