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아니라 그냥 진 거라고 해 줘

40대 중반 여자 직정인으로 살아남기 ep8

by 이름없는선인장

나는 이번에 실패했다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자도 아니었다.


삶에서 실패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 걸까.

난 아직 인생의 중반까지 밖에 오지 않았는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이기다’, ‘졌다’ 정도로만 표현하면 안 될까?



I. 성공

나는 초년기는 나름 유복했다.

조기 유학에, 좋은 교육을 받았고

나름 좋은 대학을 나오고, 영어에 능통했다.

귀국 후 대기업 인사팀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고 운 좋게 바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 후 해외 각지로 출장을 다녔다.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리버스 컬처쇼크(reverse culture-shock)-역 향수병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는 거의 인생의 반을 해외에 있었기에 집에 돌아왔지만 이 곳은 낯선 곳이었다.

문화적 차이에 군대식/보수적/한국식(?) 직장 생활이 더해져 적응하는데 힘들었다. 거기다 한국말이지만 회사에서 직장인들이 쓰는, 선배님들의 일 언어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해외마케팅이라 영어를 많이 쓰고

해외파가 많고 조금은 유연한 문화를 가진

부서 중심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 버텼다.


그러나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대기업의 치열한 경쟁구도,

출장, 야근 등으로 대리를 달고

동료들은 아프거나 유학으로 대기업을

떠났고 나도 나의 20대 후반을 모두 올인하고

30대 문턱에서 아프기 시작했다.

회사도 퇴사하고 엄마일을 도우며

(=병원을 자주, 눈치 안 보고 다니기 위해…)

재발을 2-3번 반복하며 30대의 10년은 병원을 다녔다.


불안하고 고립된 삶을 살았다.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세상 사람들과 섞이기 힘들었다.

직장이고 커리어고 관심도 없었고,

온전히 날 위한, 내 삶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소기업이지만

부모님이 하시는 가업 승계를 강요받으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길을 가라는 압박에

삶에 의욕도 없었고,

컨트롤도 없었다.


그 사이 10년 넘은 베프와도 한 순간에 싸움으로 연락이 끊어졌고,.

첫 째도 아닌 막내가 첫 째 노릇을 하는 것에 지치고,

이런 효녀 코스프레도 힘들었다.

나를 위한 삶이 없었다.


벗어나기 위해

이직을 위해

내 능력을 다시 가다듬기 위해

난 국내에서 MBA를 갔다.


형제들 모두 석사 소지자.

나도 질 수 없었다.

작은 학교지만

대학 총장상도 받고

영어도 아직 녹슬지 않았구나,

아직 그렇게 뒤처진 건 아니구나.

이제 노력하면 되겠구나를 느끼며 졸업했다.


그 후 사업은 우여곡절 끝에 정리하게 되었고,

삼십 대 중후반에

난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무직 기간이 길어지자

다른 길들을 알아봤다.


살릴 건 영어능력 밖에 없었지만

TESOL 자격증도 있었지만

영어학원 시강도 하며 문을 두드렸지만

쉽지 않았고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

(난 verbal 보다 text-based가 좋다)

번역도 한글능력이 반토막인 상태라 어렵고

(모국어를 잘해야 번역도 잘한다)

포트폴리오도 없고 업체에 리스팅만 하고 시작도 못했다.

사서도 하고 싶어 사서자격증도 취득했지만

연봉이 너무 작아 생계를 생각해야 했고,

시간이 지나자 현실 직시를 하게 되었다.


서른 중후반.

다른 길을 찾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재미는 없어도 내가 예전부터 하던 일,

잘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게 더 쉬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다시 마케터의 길로 들어섰다.

첫 신입사원 때처럼.


그리고 중소기업이지만

과장-차장-부장으로 승진했고

그 사이 마케팅팀 팀장이 되었고

다시 중견기업으로 이직도 하며

팀장으로 언 6년이 되어갔다.


난 그렇게

마케팅 팀장이었다.


II. 실패?

코로나로 해외도 휘청거리고

해외사업이 축소되면서

나는 팀에서 유일한 마케팅 경력자임에도,

팀은 마케팅팀이라고 남겨 두게 되었지만

장의 자리에서는 내려오게 되었다.


팀원들을 지원해 주고, 대신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자존심에 혼자 야근도 많이 하며

팀성과를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팀원들의 평가가 높아져도

내 점수는 낮았고,

그들은 그들이 알아서’ 일 잘하는 것처럼 되어

마케팅 전문성은 없지만, 젊다는 이유로

내 팀원이 나의 후임 팀장이 되었다.


나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외 사업인데도,

마케팅도 했고,

리더의 경험이 많은데도,

하물며 영어를 하는데도

해외 파트에 남을 수 없었다.

본부장은

“해외랑 결이 안 맞는다”는

이상한 변명과 죄송하다는 말만 남겼다.


그리고 난 이제,

국내 마케팅팀 부서로 발령받고

팀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 팀으로 올 때도 ‘그 정도 스펙에 왜 여길 오냐’는 말과 ‘더 좋은 다른 곳을 가겠지’ ‘갈 수 있잖아’가 많았다. 그럼에도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지금 이직 시장이다)


팀장님은 나보다 한 달 먼저 팀에 오게 되었다는 사원을 나에게 붙여주시며, 사원이 담당하고 해야 할 보고서 일을 나보고 “같이 해주라고, 같이 해보라”라고 하신다. 그 사람 담당이지만 전체 보고서를 내가 다 잡아주고, 80프로를 내가 다 써 주고, 새벽 1시까지 집에서 보고서를 만들고 차장이라 임원 보고도 내가 해야 하고. 그냥 아랫사람들 일을 내가 다 만들어서 챙겨주고 있다. 생각해보니 데자뷔다.

예전 팀원이 생각난다. 왜 여긴 위에 사람들에게만 일을 시킬까? 그래서 아랫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소리가 ‘이건 윗 분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며 오히려 본인들이 어렵게 느끼거나 하기 어려운 일은 담당이지만 책임지지 않고 놓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안다. 담당자로서의 책임의식과 노력은 하자고 말하는 거다)


그러면서 난 차장이니,

내 담당 일은 또 따로 해야 한다.


정신없이

이 팀에 온 지

이렇게

한 달이 되었다.


*이후의 에피소드는 살짝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pl831/109




아직도

기존 부서에 함께했던 내 옛 팀원들을 보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들도 불편해한다.

나는 이제 직책에서 내려온 사람이고

어찌 보면 같은 팀원이지만

동급으로 대하기 어려워한다.


난 개인적으로는 팀장이 된 옛 팀원을

따로 보기는 아직 불편하다.

내가 그녀를 ‘’팀장님’-‘ 이라고 부를 준비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녀 탓이 아니라

그 자리가 어떤지 알기에.

자리가 사람을 어떻게 바뀌게 하고.

사람들의 대우도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기에,

지금 내가 역으로 팀장이었을 때와 아닐 때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를 뼈저리게 느끼기에

더 자리를 피하게 된다.


또, 이젠 다 다른 팀 소속인데도

그들끼리 만날 때도 난 부르지 않는다.

그걸 우연히 점심 후 산책 시 보게 되었고,

유독 나름 챙겨주고 내가 유일하게 면접보고

뽑았던 팀원이 오히려 나를 더 멀리하거나

새로 팀장이 된 팀원과는 단 둘이 점심을 먹으면서

나하고는 따로 점심도 먹지 않는 걸 보니

어려워하는 걸 보고, 좀 섭섭했다.

권력에 반응했다라고 느끼는 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그래도 다행이다.

일적으로는 다 새로운 일이라

예전에 관리자로서 팀원들과의 감정노동보다는

새로운 정보 습득과 이해를 요하느라

그냥 머리가 너무 포화상태다.

그런 저런 일에 맘 쓸 여력도

씁쓸해 하기에도 내 삶은 지금 너무 스펙터클 하다.


또,

나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이런 부분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평생 인맥은 아닌 걸로.



III. 두려움


가지지 못하는 것

소유하지 못하는 것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


팀장,

관리자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할 줄 솔직히 몰랐다.

내가 권력의 자리를 탐하는 자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생각보다 나는 많이 관리자가 되어 있던 것도 있지만 성향이 매사 숲을 먼저 보는 스타일이라 더 잘 맞기도 했다.


연봉.

솔직히 연봉이 약 4-500만 원 깎였다.

이게 제일 더 슬프고 자존심 상한다.

내 사전에 하향 연봉은 없었는데..

코로나라 참는다.


동료.

난 진정성 있는 인간적 교감과 팀워크를 중시한다.

진정성과 예의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벗어나는 팀원들, 동료와

일하기 힘들다.

마음을 터놓고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일하지 못하는 요즘.

정말 참 재미없이 혼자 일한다.

미친 듯이, 일만 한다.

쓸쓸하다. 아니 그것만큼 힘든 게 없다.


마케팅

해외에선 난 떠나고, 업무도 날아가고,

팀 이름은 마케팅으로 남겼지만

국내에선 팀 이름이 영업지원으로 바뀌고,

업무는 남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고 있다.

그들은 항상 마케팅을 하고 있는데

마케팅을 안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면서 다른 ‘마케팅’을 하라고 하면서도

전사 조직 내에서는 ‘마케팅’을 대외적으로 보이는

팀 명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래, 마케팅하지 말자. 영업만 하자.


또 졌다.




그래도 이 모든 걸 실패라고 해야 할까?


실패가 아니라

진 거라고 이야기해줘.

테니스 3세트에서 1세트 정도 진 거라고.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은 거라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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