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할 수 없기에 피조물이며, 그러므로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약한 존재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었는데, 소울메이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 것에 외로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란 것을 깨닫고, 홀로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를 자신에게 안위하며 지내왔지만 그 이론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왜 이런 마음의 상태가 되었을까를 돌아보니 경제적 안정이 되니, 생계라는 생존의 문제에 눌려 있던 한 단계 위의 행복의 조건을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비단 이런 나의 모습뿐만 아니라 아마도 혼삶을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이들은 소울메이트를 찾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였다.
인간의 행복은 사랑에 있다. 사랑의 상대는 타인이어야 한다. 사랑의 상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는가를 향해 얼마동안 살아보았지만 부정적인 입장이다. 아직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신만을 사랑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내게 있어도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감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인간은 반드시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 DNA를 탑재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였다.
혼자서 오롯이 잘 살아가는 사람을 알고 있다. 60세가 넘은 그녀는 외롭지 않다고 한다. 그녀는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자녀가 있다면 외로움은 훨씬 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애완동물을 함께 산다고 하면 어느 정도 혼자라는 것이 감당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유난한 감성적 성향으로 인해 훨씬 더 소통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나이가 갖는 호르몬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가족의 구성원이나 애완동물의 생명체와 함께 살았을 때 외로움 혹은 고독감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
친구관계인 소울 메이트만으로 충분한가. 소울메이트는 아마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삶을 살기에 가능할 것 같다. 인생에 너무 많은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욕심은 버려지지 않는다. 이것은 해결해야 할 잘못된 욕심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쪽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신이 주신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표족한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불만은 더욱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상황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고 느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주위에 일상적 대화가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이 소통의 부재는 혼삶이 아닌 이들에게도 갖는 고독감이겠지만) 이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달라서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감성주의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생각해본다. 적어도 현재 신이 나를 홀로 두시는 것은 맞다.
사람을 통하여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것도 대체될 수 없는 명백한 진리는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은 혼삶을 살고 있고, 나는 수많은 1인가구 33.4% 중에 포함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분석해봐도 나에게 치명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원인은 없다. 운명이란 성격은 그렇게 원인이 없다. 그냥 그런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지 않고 노동을 하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 인간은 움직이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소울메이트는 원한다고 해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면 소울메이트가 없는 삶을 적응해야 하며 이 상황에서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혼삶을 고찰하며 1인 가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그리고 더 늘어나게 될 이 시점에, 어떤 정보도 요령도 없는 대안도 위안도 없는 너무나 부족한 혼삶 가이드의 데이터를 내 사유로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다.
또한 일반화되고 있는 이 상황에 혼자삶이 뭔가 문제가 많은 것처럼 인식하며 결핍감을 스스로 느끼고 있을 수도 있음을 묵과할 수 없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라도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독과 외로움들은 글을 쓰는 소재가 되고 고민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과 고독감은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혼삶을 바라보는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넘치고 있는 감성을 조금 진정시키고 이성의 비율을 늘려야겠다. 글은 감성으로 쓰는 것이지만 쓰다보면 이성과 적당한 비율을 갖는 성격을 띄며 정돈이 된다.
인간은 삶에서 상황과 조건과 한계에서 상황에 가장 알맞은 길을 모색하며 간다. 또한 그 방법은 시행착오와 깊은 사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속에서의 어떤 스토리를 만들고 어떤 사유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 사유의 조각들이 생명을 갖기를 바란다.
삶에서 가장 옳은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삶에 가장 알맞고 적당한 길을 모색하며 살아갈 뿐이다.늘 그렇듯이 주님은 이런 한계상황에서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신께서 글쓰는 내 삶에 지금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주어진 조건에서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다른 대안을 만들어 내는 창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