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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Oct 28. 2022

그때 나는 열두 살

 - 뭉크 <사춘기>,  캔버스에 유채, 149*115, 오슬로 국립 미

                 열두 살                                                   

                   


그때 나는 열두 살,

열다섯 만 되었다면

덜 무서울 텐데

아아, 그때 나는 열두 살



‘동박 굴 트멍’*으로

어멍 시체 찾으러 갈 때

가마니 짚에 말아

얼기설기 토롱**해서

남의 밭에 묻고


불타는 집

고팡(광) 가득한 곡식 보며

저건 꺼내서 무엇하나

어멍도 죽고

나도 오늘 낼 죽을 목숨

빈 집 무서워

외숙모 집 구석방에

밥 먹을 때면

어멍 숟가락, 언니 숟가락 걸쳐놓고

밥숟가락 놀리다가

아이고, 우리 도새기(돼지) 굶겠구나

통시***로 달려가면

꿀꿀꿀 반기며 엉겨오는 도새기

너는 어떵(어떻게) 살래?

나는 어떵 살코?

도새기랑 말하면 덜 외로워

빈집도 빈 마당도

덜 무서워



바다같이 넓은 밭

목청 좋은 어머니

보리 검질 맬 때면

남보다 앞서 나가

어랑어랑 사대 소리

보리타작 끝나면

외삼촌들 부르는

얼럴러 좁씨 밟는 소리

물 좋은 도두리

얼음 같은 물

대바지 허벅에 길어와

마당에 보리낭 넉넉히 깔고

톳 냉국에 보리밥 펼쳐 놓으면

아이구 착허다 내 딸 착허다

어머니 칭찬 소리

팔십 년 사는 밑천이 되어



세상천지 다 돌면서 봐도

나만큼 전생궃은 이 있을까

좋은 전생 가리던 날에

어머닌 어디 갔다 왔나요

어멍에게 날 가라고 하면

가시덤불도 맨발로 새 날듯 가련만



어멍, 나 시집 못 살쿠다게(못 살겠어요)

아기 업고 혼잣말하면

어디선가 어머니 음성

‘설운**** 내 작은 년아....’

밑에서 샘이 올라오듯

탁탁 의견이 올라오고

귀인을 보내주고

열두 해 부모 인연

여든두 해, 오늘까지 살아뵈고



그때 나는 열두 살

열다섯 만 되었으면

어멍 가는 길 고운 옷 입게 하고

삼촌들 성가시게 안 하고

집 탈 때 세간도 꺼내고

물 그리듯 그리운 어머니 옷가지

삼단 같은 머리채 담은 고리짝

타는 집 뛰어들어

바리바리 꺼냈을 걸



무자년 추운 겨울

1948년 음력 12월

그때 나는 열두 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작가의 말)

 외가 제사 때가 되면 어머니 신경은 날카로워지셨다. 그 시대 관습으로 종제사를 맡은 큰며느리가 친정부모 제사까지 갖고 와 지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불편함을 내게 화내는 것으로 풀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일기를 보면 나는 외할머니가 공산당에게 돌아가셨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20대가  되었을 때야 군인에게 총살된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나의 '제주 4.3 진실 알기' 여정이 시작되었다.


 1971년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일기


 외가 제사 때가 되면 평소에 한 번도 내왕이 없던 먼 외가 친척 몇 분이 오셨다. 난 그분들이 친가처럼 친숙하지 않아서 빨리 돌아가길 바랐고, 어머니는 파제가 끝난 자정 넘은 시간인데도 더 붙잡고 싶어 하셨다. 최근에 어머니께 외가 제사 손님들이 불편했노라고 고백했다.  

" 너야 밤늦게 손님 부름시(심부름) 해야 하니까 싫었겠지만 난 죽은 부모 영혼이 오는지는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친정 쪽 그 사람들이 와야 제사가 되는 거 같더라"

   외할머니가 군인의 총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어머니. 외할머니는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을 때도 막내(어머니) 걱정만 하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가 제삿날에는 샛(둘째의 뜻)이모님이 장사하느라 제사를 모시지 못한 미안감으로 제수 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빙떡과 기름떡 그리고 약밥(약식) 상어 젓갈 등.

 

 시국이 위험해질 무렵 외할머니는 샛이모를 미군정에서 일하는 이모부에게 시집보냈다. 17살 이모는 중신만 오면 방안에 들어가 울었다.

 " 금승 말 갈기가 왼 짝으로 갈지 노든 짝으로 갈지 "

할머니가 탄식처럼 하던 말, 한 살 된 어린 망아지 갈기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치우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할머니는 산에 간 아들(외삼촌)과 경찰 쪽 사위(이모부)를 같이 살릴 수 있다면  당신 한 몸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결국 샛이모 가족은 살아남고 나머지 외가 식구들은 막내( 어머니)만 남기고 총살됐다. 어머니는 집안 어른 모두가 죽어 텅 빈 집에 어려서 살아남은 조카(4살)와 둘이 버티다가 통행금지령이 풀리자 제주시 큰아버지 집으로 가고 외조카는 사돈 할머니가  데려갔다.

큰집에 얹혀 살다 16살에 부산 영도로 나간 어머니는 국제시장 재단사 보조로 일했다. 5년 후 친척의 주선으로 제주도 남자(아버지)와 결혼하였고, 사라호 태풍이 강타하던 해  나를 낳았다. 지금 86세 어머니가 이룬 가족은 증손녀까지 25명이다.


걸프전(1991년)이 있던 해, 점포 문을 닫고 늦은 밤 외할머니 제사에 온 샛이모는 흥분된 목소리를 누르면서 말했다.

" 4.3 때 같은 전쟁이 또 터졌어(일어났다)... 40년 전 그날도 똑 오늘 같은 추운 겨울이었는데"   

경찰가족으로 살아났지만 샛이모는 4.3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알고 계신 듯했다.


제주지방법원 법정에서 오빠의 재심 무죄 판결을 기다리며  


어머니에게 오빠(당시 26세)는 부모보다 큰 존재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그 자리를 대신한 오빠가 있는 동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았노라고 했다. 그 오빠가 군사재판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이 나자 집단 총살되어 흔적이 없어졌다. 다행히 재판기록이 발견되어 최근 무죄 판결을 받았다.

"뭐니 뭐니 해도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귀한 거지. 우는 아기 던져버리라고 할 때야,  그래도 내가 그 시국 속에서 4살 조카를 살려 그 집안 일꾼 만들었어."

4.3 때 돌아간 큰언니 비석 앞에서 (2021년 촬영, 8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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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도두리마을  "동박곶 홈"을 말하는데 이곳에서만 183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이 시기 학살은 집단 총살 후시 마을 사람들에게 철창으로 다시 찌르라고 한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심 씨가 학살현장에 갔을 때 1살 아이를 업은 큰언니는 몸이 갈가리 찣겨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총살된 시체를 마을 단체인 민보단원이나 우익단체 대한청년단원을 시켜 다시 찌르게 했다는 증언들과 산 사람을 민보단원을 시켜 철장으로 찔러 죽이게 하는 증언들이 나온다.


** 흙을 쌓아 임시로 간단히 만든 무덤, 가매장

*** 돼지 기르는 변소

*****가엾고 불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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