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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Mar 25. 2023

이야기 흐르는 사계

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19

경칩에 쓴 글


  경칩이다. 가까운 공원 한 바퀴 돌며 포근한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었다. 직접 탄 커피를 넣은 텀블러, 노트북을 챙겼다. 평소 메고 다니는 무게 있는 메신저백 대신, 하얀 무지 에코백을 들고 나갔다.


 오후 2시쯤 되니 햇살 드리지 않은 곳이 없다.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 산보하는 사람 모두 옷차림이 가볍다. 두터운 패딩에 파묻히듯 다녔던 건 정말 지난 날이 되었구나. 걸치고 있는 자켓이 쌀쌀하지 않을까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목덜미 쪽 카라가 무겁다. 셔츠에 스물스물 땀이 번졌다.


 발을 디디자 으드득 얼음 깨지는 소리 대신 제법 모래가 잘게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유독 추위에 약하다보니 움직임도 적었고 그래서 울적했는데.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움직임도 빨라졌고, 봄볕이 드리운 얼굴은 윤슬 같이 빛나고.  


 이렇게 줏대 없는 사람이었나. 날씨 하나 때문에 기분이 이토록 산뜻해질 수 있나. 풍경을 놓칠세라 말똥해졌다. 잊고 있던 이런저런 감각을 만나는 게 좋다. 마치 검은 도화지에 물감 묻은 구슬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같다.


 바람에 잎사귀 잃은 나무, 메말라 바닥에 이리저리 뒹구는 나뭇잎. 아직 황량한 기색이 남아있지만, 언젠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할 테고, 나비와 벌은 어린이들에게 쫓기겠지. 여기저기 구석에 숨어있는 동물들도 생동한다. 봄의 정점에 도달하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기분 좋게 그 모습을 그리는데 마음 한쪽에 돌연 불청객 같은 걱정이 치밀고 들어온다. 이 좋은 순간은 한철이고 너무 짧아. 추위와 더위 모두 타는 나는 여름과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초여름을 지나면 어질어질할 정도로 더울 텐데. 더위가 풀린 선선한 가을도 지나갈 거고 머지 않아 강추위가 찾아올 텐데. 악전고투할 날이 머지않았네. 왜 매 산뜻함의 끝에는 우울이 도사리는걸까.


 평소보다 오래 걸으니 힘에 부친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카페에 들리기로 했다. 가고 싶은 곳은 너무 소란스러워서 발걸음을 돌렸다. 걷다 보니 카페 하나가 보인다. 여긴 어떤 곳이려나. 찾아보니 가려던 곳보다 가격이 괜찮았고 디저트도 다양했다.  


 시원한 카페라떼 한잔과 레몬 마들렌 하나를 샀다. 설탕 코팅이 잘 되어있어 한입 깨무니 달고 바삭하다. 레몬즙으로 촉촉해진 속 안은 적당히 부드럽다. 산미 없는 카페라떼의 끝맛이 고소하다. 의외의 곳인데 맛도 분위기도 성공적이다. 오늘 만난 감각과 방문한 곳을 기록하는데 문득 그림책 '프레데릭'이 생각난다.


 겨우살이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들쥐들이 프레드릭에게 질문한다. 왜 너는 일하지 않니.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이야깃거리를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나잖아."


 모아놓은 식량은 점차 떨어지고, 주위는 을씨년스러워지고, 마음은 더없이 가난해질 때 프레데릭은 차곡차곡 쌓아왔던 이야기를 꺼낸다.


"맑은 날씨는 누가 가져올까?

유월의 네잎 클로버는 누가 피워 낼까?

날을 저물게 하는 건 누구일까?

달빛을 밝히는 건 누구일까?

봄 쥐는 소나기를 몰고 온다네.

여름 쥐는 온갖 꽃에 색칠을 하지.

가을 쥐는 열매와 밀을 가져온다네.

겨울 쥐는 오들오들 작은 몸을 웅크리지"      


 그의 이야기는 잊혀진 계절을 부르고, 계절의 감각은 추위에 곱아든 몸과 마음을 데운다. 그들 모두 겨우내를 생기 잃지 않고 버틴다.  


 나도 날 좋은 날에 찾아온 무수한 감각을 기록해야겠다. 모진 날씨와 함께 더불어 마음이 기름지지 않을 때 읽으며 버틸 수 있도록. 봄에 쓴 글에서 햇살 한 줌을 찾고, 가을에 쓴 글에서 수확한 걸 돌아봐야지. 오늘 공원의 풍경. 레몬 마들렌. 카페라떼. 또 앞으로의 것들. 이 좋은 봄과 가을은 언젠가 돌아오리라 그런 믿음은 여름내와 겨우내를 살아가게 한다.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을 때 생기는 힘으로 더위와 추위를 갖은 방법으로 이겨내는 모습 역시 기록할 수 있을테고. 무엇보다 우리의 이야기를 타인과 공유하며 공감과 기쁨을 얻을 때 충만함과 풍성함은 배가 된다.


 마음이 척박해지지 않도록 계절을 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이야기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는 능력. 이야기 흐르는 사계는 얼마나 찬란할지. 올 한 해 여름과 겨울에 대한 무서움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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