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18
냄새나고 세균이 득실대는 불결한 장소라는 인식이 있지만, 인산인해인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화장실은 안전지대이다.
1. 2022. 11. 23
여러 독립출판사가 모여 홍보와 판매를 진행하는 행사에 간 적이 있었다. 행사가 건물의 8층에서 이뤄져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사람들로 빽빽해진 엘리베이터의 버튼 중 오로지 ‘8층’만이 하얗게 빛났다. 마침내 입장한 순간, 수십 개의 부스와 수백 명의 인파에 머리가 띵해졌다. 몇 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사람들과 자꾸 부딪쳤다. 어느 부스를 먼저 가야 할까. 잠시 멈춰 서서 어찌할 바 모를 때 나오는 버릇인, 애꿎은 입만 잘근잘근 씹으며, 눈을 열심히 굴렸다. 정신을 차리니, 멈춰 선 나 때문에 통행에 지장이 있는 듯했다. 내 쪽으로 오던 이들이 한 번 멈춘 뒤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황급히 비켜선 뒤 서둘러 찾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면 줄이 길 법도 한데 다행스럽게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한 뒤, 문을 잠그자, 경계가 처졌다. 웅성대는 소리가 확 잦아들고, 자그럽지 않게 윙윙거리는 백색소음만이 들렸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두어 개 푸르고 호흡을 길게 내쉬니, 뻐근했던 어깨와 목이 한결 풀어졌다. 소맷단을 다시 추켜 매고, 흘러내리는 양말을 바싹 올렸다. 문을 열고 거울에 비춘 나를 보며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수돗물로 흘러나온 잔머리를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부스로 가는 거야. 뭐든 그곳부터 들리는 거야.’ 그 경계 안, 안전지대에서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행사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제일 처음 본 곳은 우연히도, 자주 가는 독립서점에서 그림을 구매한 적 있는 아티스트의 부스였다. 비닐백 하나를 산 뒤 몇 바퀴를 돌며 그림책과 그림을 샀다.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물어보고, 그들의 명함을 받았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들이 들었다. 내년에는 내가 여기서 한 자리 맡으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사히 방문을 마쳤다.
2. 그리고 오늘.
모처럼 아르바이트 오프 주간이었다. 행궁동에 갔다. 발걸음이 뜸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바뀌었다니.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는 곳이 뜨문뜨문하게 자리했었는데, 이젠 그것도 옛날인가 보다. 다 화려하고 다 새로웠다. 어느 곳을 가도 자리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조그마한 카페도 마찬가지였다. 옆 동네인 중동으로 향했다. 아는 카페로 가서, 아는 메뉴를 먹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마시고 크로와상을 우물거리며, 넷플릭스에서 몇 번을 본 프로그램을 다 보고 심심해진 찰나, 다른 카페로 갔다. 내부에 아주 ‘만족스러운’ 화장실이 있는 곳이었다. 주문하고 받은 진동벨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처럼, 길게 숨을 뱉었다. 조금 더운 숨이었다. 거울 속 나는 고생했다는 눈빛으로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는 내내 땀을 잔뜩 흘렸고, 부딪치는 인파의 짙은 땀냄새를 맡고, 더위에 찌든 나를 앉힐 의자와 커피가 있는 카페는 아무 데도 없는 건가, 잠시 절망했고, 그런 정신없는 순간들이 있었지. 디퓨저 냄새가 진하게 나는, 우드톤 조명이 비추는 그 안전지대에서 나는 제법 안정을 찾아갔다.
오늘, 그리고 무수한 그 어느 날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혼란을 느낄 때마다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불쾌한 냄새가 나는, 부서진 타일과 변기가 있는 지저분하고 위태로운 화장실도 수두룩했다. 그 속에서 도리어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정상인가 쓴웃음을 지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새로운 곳에 오거나, 새로운 집단에서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이 화장실로 향하는 걸 종종 봤던 것 같다. 거울을 보며 희망차게 첫인사를 연습하기도 하지만, 결국 내 몫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지 못한 주인공은 무리를 헤치고 나와 꾹 참았던 울음을 화장실에서 터트리고 만다. 심지어 도시락을 무릎에 둔 채 식사까지 한다... 적응 과정 중 하나인 '안정의 시간'을 가진 주인공의 얼굴은 이내 차분해진다. 우리나라의 영화에서도, 다른 나라의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한 번씩 나온 걸 보면 만국공통, 화장실은 안전지대로 통하나 보다. 거리낌 없이 앞으로도 애용해야지. 뭐 어때. 낯선 소리와 낯선 사람들 사이에 경계가 될, 내 몸 하나 지탱할 한 칸이면 냄새가 나더라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