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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Sep 04. 2023

오랜만에 요리

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20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버스를 올라타는 순간, 뱃속에 조그맣게 웅크렸던 허기가 사정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내내 서서 오는데 무심코 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표정이 울적하다. 배가 몹시 고팠다. 간신히 두 정거장을 남겨두고 앉았는데, 창문 밖에 대형마트가 보였다. 결국 집 앞에 바로 서는 버스를 마다하고 급하게 일어나서 내렸다. 요리하고 싶은 게 있었다. 면류와 소스 코너에 가서 페퍼론치노와 링귀니 면 하나를 샀다.

집에 들어가니 신문을 보던 엄마가 반긴다.

“밥은? 난 먹었는데.”

“괜찮아. 요리할 거야.”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은 내가 해 먹을 거야. 가방에서 재료를 꺼내는 걸 엄마가 유심히 본다. 그래. 잘해 먹어. 웃으면서 대답했다.

잘해먹어야지. 오랜만에 해 먹는데. 팔팔 끓는 물에 면을 넣어 익히고, 올리브 오일에 페퍼론치노와 굴소스, 다진 마늘을 섞은 뒤 면과 함께 볶는데, 자작해질 때쯤 미리 받아놓은 면수 한 국자 넣는다. 위에 후추를 솔솔 뿌리면 후추 파스타 완성. 사실 후추가 메인은 아닌데, 넣은 재료 중 향이 가장 세다 보니, 그렇게 부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에 파마산 치즈 가루를 뿌렸다. 돌돌 말아 입 안에 넣으니, 재료가 어우러져 맵고 고소한 맛이 났다. 더운 요리를 먹으니, 땀이 났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숨을 크게 내쉬는데, 저녁까지 정신없이 보낸 하루가 그제야 매듭이 지어지는 듯했다.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었다. 4분이면 뚝딱 끓여 먹을 라면이나 일회용기에 재료를 쏟아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음식을 먹을 때와 아주 다른 기분이었다.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을 때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크게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생동감이다. 재료를 만지고, 그것을 볶고, 열기를 쐬고 그릇에 덜어 입에 들어가기 전까지 마음속에는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같은 사람이 만들고, 꽤 반복해 온 요리더라도, 직접 만들게 되면 만들 때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지니 오늘은 어떻게 맛이 다를까, 맛있을까, 그런 기대감이 있다. 또 재료의 맨 처음의 감촉과 냄새를 모조리 맡을 수 있으며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소리에 적막이 깨진다. 그래서 요리는 참 감각적인 과정이다. 하루가 참 무심하게 흘러갈수록  요리는 참 필요한 것 같다. 다양한 감각을 맞이하며 잠시 하루가 반짝이는 듯하니까.

 두 번째는 ‘내가 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안 되던 그림책 주제를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쓸 만하면 막히고, 포기하기엔 뭔가 아깝고. 지난한 집착의 시간이었다. ‘인정받을 만한’ 그림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은 나는 쓸모없다는 잘못된 믿음이 은연중 생겼을 때였다.

그러던 중 ‘하루 한 끼’라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말 그대로 하루 한 끼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요리를 만드는 유튜버의 영상이었다. 스팸 무스비를 만드는 과정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집에 스팸이 있었나, 장롱에 깊숙이 박혀있던 스팸 하나를 꺼내어 기다랗게 잘랐다. 영상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쌀밥에 단촛물을 코팅하면 여러 맛이 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만들다 보니, 어느새 무스비가 완성됐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만들었다. 새우 넣은 오므라이스를 만들기도 하고, 부침개도 만들고, 참 많이도 만들었다.

어느 날, 간장과 설탕 섞은, 소스 바른 구운 주먹밥을 우걱우걱 삼킬 때였다. 문득, 나는 하루 한 끼로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뚝딱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나는 내 배를 스스로 채울 수 있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이지.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 그날 망친 기분이 제법 맑게 개였다.

 막힌 원고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대신 언젠가 쓸 수 있을 때 쓰자, 편안하게 내려놓을 힘은 생겼다. 나중에야 비로소 애초에 내가 쓰고 싶었던 원고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그 원고 때문에 고생했던 한 주처럼,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는 한 주간을 보내느라 힘들었다. 글이 안 써져서 안 썼는데, 그것대로 걱정만 잔뜩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소진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뱃속만 허기졌던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오늘 오래간만에 재료를 다지고, 프라이팬에 지지고 볶고, 그런 생동하는 과정을 겪은 후에 글을 쓸 여력이 생겼다. 하루 중 생동하는 불빛을 본 게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글감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지는 사람이 아니야. 음식도 잘해 먹은 것처럼 글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오늘 해 먹은 음식이 결의가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든 오늘의 음식처럼, 오늘의 글을 정성껏 써본다. 마음이 덥고 든든하게 채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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