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16
중학생 때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극도의 긴장을 느끼고 몸이 내 것처럼 움직이지 않은 걸 경험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마치 아주아주 큰 무대에 수많은 관객 앞에서 홀로 무대를 꾸리다 실수한 공연자가 된 느낌이었달까.
자라면서 괜찮아졌다고 안심했을 무렵, 그것이 또 나를 덮쳐와 수치심을 느꼈을 때. 성인인 지금도 온갖 대비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앞에 설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노력으로도 상담과 치료로도 완전히 고칠 수 없었을 때. 내 아픔을 위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세간이 다 노력 앞에 장사 없다고 말하길래 고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나름대로 투지를 발휘하며 싸웠는데 결국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어찌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기억할 수 있는 첫 체념이었다.
내 몸인데. 내 몸은 명백히 내 건데. 내 거 하나 마음대로 못 다루는 내가 어찌나 무능하게 느껴지던지. 그런데 살아보니 이것만이 아니었다. 체념해야 할 건 왜 이리 많고 절망할 건 또 왜 이리 많은지. 이룬 게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룬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에 매몰될 때도 있었다. 그 빈도가 잦아 창피하지만, 어느새 무맥함이 내 성격의 한 부분으로 자리했다. 그것 때문에 하루를 시작하면 희망도 있었으나 절망도 함께였다.
오늘도 카페에서 그런 절망감에 미묘하게 눌린 채 그리기를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손이 내가 원하는 대로 수업 자료를 따라 그리는 것이다. 비록 똑같이 그릴 수 없어도 내 손을 통해 기다렸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니 우리가 100일 동안 함께했던 카페에 내가 남긴 글이 있었고 그 밑에는 메이트들이 보내준 응원이 적혀있다.
생각과 감정을 따라 내 손은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완성한 걸 소중한 사람과 공유하고 있었다. 90일째 당연하게 해 오던 일이 왜 이리 신비롭게 느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내 목과 내 다리는 나도 어쩔 수 없었는데 내 손은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게 묘했다.
그런 마음이 드니 커다랗게 보였던 내 무능이 내가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로 바뀌었다. 무력을 이기기 위해 바삐 움직였던 내 손 덕분에 예기치 못한 흡족함을 느꼈다. 그 흡족함은 내가 그 무능에 더 이상 예속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했다. 내 손으로 만든 글과 그림은 나를 위로하는 절친한 존재, 내가 나일 수 있게 지키는 무기였다. 그로 말미암아 내가 모르는 새에 조금씩 자유로운 존재로 변하고 있던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맥을 못 춰도 이제 나는 괜찮을 것만 같다.
90일째의 개안이었다.
* 꽃 피우든 피우지 못하든 당신과 나, 모두 살아남을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