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14
*녕과 완은 저희끼리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가칠하다 - '까칠하다'와 의미는 비슷하지만, 덜 센 느낌을 주는 단어.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녕은 살짝 두툼하다 싶은 손을 가졌다. 팔다리가 얇고 길쭉한데도 손만 그렇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에 도톰한 손가락, 가칠한 살결. 마치 산행을 즐기는 사람의 것과 닮았는데, 녕은 회화를 배웠고 그림을 그려왔다.
녕과 나는 그림책 아카데미에 함께 다녔다. 녕이 만든 주제나 명제를 보고 선생님은 가차 없이 말했다.
“못 그려요 이거. 그리기 어려운 주제를 가져오셨어요.“
녕은 얼굴을 붉히거나 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대신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제가 무엇이든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 있어서요.”
그리고 다음 수업 날, 녕은 정말 해내었다. 녕이 처음으로 그려온 그림은 채색되어 있지 않고, 연필 선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날, 연필 선도 다채로울 수 있음을, 검정색도 따뜻한 색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녕은 그런 걸 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수업 이후에도 함께 공부했다. 수업이 끝나면 누가 모이자고 말하지 않아도, 모두 빈 강의실에 남았다. 처음 시작한 날, 쭈뼛거리는 우리를 보며 녕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녕의 옆과 앞자리는 우리로 채워졌고 우리의 몸은 녕을 향하게 되었다. 그녀가 맨 처음 가르쳐준 것은 연필 깎는 방법이었다. 녕은 사물을 잡을 때 손을 넓게 펴서, 덥석 잡는 편이었다. 마치 암벽을 잡듯이. 그녀는 검정 톰보우 연필의 몸통을 단단히 쥐어 순식간에 아주 길고 뾰족한 연필 촉을 만들어냈다. 그림을 그리는 이의 손에 딱 알맞게끔.
수업 날마다 우리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일주일 동안 그린 그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녕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그림인데 우스워하지 않을까... 그러나 녕은 훌륭한 선생이었다. 가르치는 걸 기가 막히게 잘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곁에 가면 왠지 모를 넉넉함이 느껴졌으므로 그림을 그리다 쌓인 긴장이나 초조함이 어느새 누그러졌다. 녕은 언제나 어르듯 부드럽지만, 연마해야 할 부분을 정확히 일러주었다. 언젠가 내가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강아지를 그려왔을 때였다.
“너무 귀여운데요? 그런데 선이 조금 단조로워요.“
그리고 날렵하게 두 가지 형태의 선을 그었다. 매끈한 선 하나와 하나의 선임에도 굵기가 다른 선 하나. 후자를 그릴 땐, 처음에는 손에 힘을 조금 풀어서 얇게 그리다가 이후에는 연필을 세워 누르면서 진하고 두껍게 그려냈다.
“1부터 10단계의 굵기가 하나의 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이 선이 하나하나 모여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면 어떨까요? 아마 그림이 더 재미있어지겠죠.
”만약에 제가 이 강아지를 그린다. 그럼,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저라면 이렇게… “
녕은 강아지의 눈과 코를 동글동글 그려 짙게 칠한 뒤, 그녀가 말한 대로 선을 그리며 사랑스럽고 재미있게 생긴 강아지 그림을 완성했다.
이토록 매력적인 그도 걸어온 길을 보면 매끈하게 뻗은 선과는 차이가 있다. 아마 멀리서 녕의 삶을 관망한다면, 굽어짐과 위태함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녕은 그림과 그녀가 그려내는 그림 속 사람과 풍경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평생을 그려왔다. 살아온 오늘 이후로도 끝까지 그림장이로 살고 싶었기에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학에선 그녀의 그림은 예술성보단 대중성이 짙다는 이유로 저평가되곤 했다. 분명 대중성보다 그저 녕의 색깔이 도드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작품과 다르다는 이유로 내쳐졌겠지. 게다가 지금 그녀가 알고, 당연히 반복하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대학에선 없었다. 남의 그림이 아니라, 너의 그림을 그리고 살라는 사람도 없었다. 이윽고 녕은 녕의 그림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이 점점 옅어짐을 발견했다. 결국 그리기를 멈췄다.
그래도 부지런히 살았다. 목적은 달랐지만, 연필 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공인중개사의 시험을 준비하고, 주식도, 부동산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자기 손과 연필을 보며 그리지 않고 배기겠는가. 돌고 돌아 녕은 다시 그림 앞에 섰다. 자신을 미끄러트리고, 생채기를 낸 것도 그림이었는데, 살아서 오르게 한 것도 그림이었다. 그 미묘하고 복잡한 간극에도 녕은 다시 그릴 수 있음에 기뻤다.
마침내 녕은 자신이 올라야 할 산을 새로이 찾았다. 그림책이었다. 녕은 삽화가나 만화가가 꿈이었다. 삽화가 들어간 작품 중 녕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 그림책이었다. 녕이 만난 그림책의 글과 그림은 진한 위로와 기쁨이 되었기에 녕도 그런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건 탁월하나, 글쓰기는 익숙하지 않아서 부담스러워했다. 그림책이란, 한 장의 그림을 그려내고 끝내는 것이 아닌, 여러 장의 그림을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롭게 이루어진 예술품이다. 이야기, 즉 원고가 탄탄하지 않으면 좋은 그림책을 만들기 힘들었다.
원고와 섬네일을 구성하는데 연달아 혹평받았다. 날 선 피드백이 계속 이어지면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때때로 풀리지 않는 작업으로 괴로워하며 떠난 학생도 있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녕은 계속 곁에 남았으면 하는 동료이자, 친구였으므로 말은 안 했지만, 부디 그녀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녕은 꿋꿋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왔다. 한때 평가라는 것이 녕의 목을 죄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기꺼이 평가받았다. 물론 녕이 매사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냈다. 그림책이라는 산을 오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주짓수나 산책을 통해 땀을 흘리며 오르기를 지속할 힘을 얻었다. 연필을 쥐는 손안에 땀이 가득 차더라도 부지런히 선을 긋고 이으며 이야기를 완성해 나갔다.
삶이었던 그림을 포기했을 때 찾아온 어둠을 알았다. 녕은 더 이상 그곳에 자신을 잠재우지 않았다.
“난 글 대신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게 편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렇게 무작정으로라도 그려보려고요. 완도 할 수 있어요. 우리 같이해요.”
그렇게 그녀만의 방법으로 하나하나 거친 암벽을 잡고 올라갔다.
녕의 손 역시 모든 아기가 그러하듯 갓 태어났을 땐 아마 아주 연하고 부드러웠겠지. 그러나 그녀가 살아오며 잡은 암벽 중 연한 살에 생채기를 만들 정도로 야박하며 모진 것도 있었다. 녕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스스로 부서지지 아니하도록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진화시키며 올라왔다. 그리고 올라가는 중이다. 녕이 그 모든 암벽을 넘어 올라올 그 순간, 그토록 그리고 그렸던 풍경은 찬란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녕, 그리고 그녀 곁에 서서 그녀를 지지하는 모든 이의 믿음보다도 더.
(표지는 녕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