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파양을 대하는 자세가 우리나라와는 퍽 다르다고 느꼈다. 많지 않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한 거라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파양에 대해 한국보다 더 관대하다고 느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대하다기보다는 상황을 그 자체로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감정적인 판단을 배제하는 것 같다.
어떤 파양은 괜찮고 어떤 파양은 안 되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동물의 관점에서 그 동물의 생애를 통틀어 장기적인 행복을 생각해 본다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 (더 심해진다면 학대를 받으면서) 그 집에서 화장실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호소로 돌아와 더 좋은 사람을 기다리는 게 루에게도 훨씬 나은 옵션이었을 것이다.
'파양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어쩔 수 없지'라는 느낌이다. 막상 글로 쓰고 나니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길. 아무나 쉽게 입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여기도 보호소마다 세세한 절차는 다르겠지만 꽤나 까다롭게 심사를 한다.
내가 지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보호소에서는 입양 절차가 상대적으로 간소한 듯한데, 예전에 뉴욕 주에서 고양이를 입양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전화 면접도 여러 번 했는데 줄줄이 낙방했다(!). 첫 번째 전화 면접은 우리가 희망한 고양이를 임시보호 중인 임보맘과 했는데 정말, 정말 깐깐하게 우리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더랬다. 그때는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 나빴는데 내가 임보를 해 보니 그 마음을 알겠다. 여하간 그 면접에서 탈락한 이유는, 우리 집이 그 당시 3층이었는데 '고양이가 워낙 뛰어다니는 걸 좋아해서 아랫집에 층간소음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거였다. 이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임보맘은 그 이유 때문에 파양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지금 식탁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축 늘어져 있는 우리 집 첫째 고양이를 입양했을 때는 심지어 내가 면접을 본 게 아니라 내 친구가 전화 면접을 봤다. 우리가 입양 신청서를 작성했던 두세 군데 보호소에서 모두 reference 연락처를 기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니 무슨, 진짜로 회사 면접 보냐고?!
그래서 내 친구가 보호소에서 온 전화를 받고 우리가 얼마나 훌륭하고 준비된 예비 캣부모인지 정말 열정적으로 어필해 준 덕에 우리 집 첫째 털래미를 데려올 수 있었다.
보호소에서 입양 서류를 모두 작성하고 아이를 데려올 때 보호소 직원이 당부했던 게 있다. 무슨 이유로든 못 키우겠다고 판단하면 제발 아무 데나 내보내지 말고 다시 이 보호소로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당부했다. 못 키우겠다고 보호소에 데려온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고. 정말 괜찮으니까 꼭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하도 여러 번 얘기를 해서, '내가 적당히 해보고 파양 할 사람처럼 보이나?' 하면서 기분이 살짝 상할 정도였다.
나도 처음에는 어떤 이유로든 파양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라는 주의였다. 사람 자식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동물 자식도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면 안 되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양하는 사람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물론,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 예를 들면 털이 많이 날려요, 가구를 상하게 해요, 이런 이유로 파양하는 건 정말 파렴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둘째 털래미를 데려오면서 입양과 파양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둘째는 내 시가에서 파양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시가의 고양이는 남편의 형이 10여 년 전 데려온 고양이로, 쭉 시가에서 살다가 아주버님이 결혼하고 독립하면서 함께 데려갔었다. 그러고 일이 년 후 아기가 태어났는데, 어린 조카가 고양이 알러지가 너무 심했다. 그래서 다시 시부모님 댁으로 옮겨간 고양이. 시부모님이 손주 육아를 도맡아 해 주셨는데, 아무리 청소를 깨끗이 하고, 조카 놀이방에는 고양이 출입을 금해도, 조카가 할머니 집에 다녀오기만 하면 눈물 콧물 줄줄에 몸이 붓는 통에 모두가 오랜 고민 끝에 눈물의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조카 약도 먹여봤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몇 달 동안 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이 내 가족에게 생기다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일이 되고 나니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파양하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파양은 파양이고, 그들은 내 가족이다. 이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라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고민과 논의 끝에 그 고양이는 미국에 사는 우리가 키우기로 했고, 한국에 계신 아주버님이 모든 절차를 진행하고 고양이를 미국까지 보내주셨다. 후에도 2년 정도 계속 금전적으로 지원을 해주셨다. 그게 떠나보낸 자기 고양이에 대해 최선을 다해 책임지는 모습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우리 둘째의 묘생을 생각하면 참 기구하고 팔자가 사납다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가 우리 집으로 온 후에 그전보다 훨씬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절대 없다. 사람 자식은 안 버리면서 동물 자식이라고 쉽게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제 배 아파 낳은 사람 자식도 버리는데, 하물며 동물 자식이야 말해 무엇하랴..
나 스스로 그런 일을 겪기도 했고, 미국 보호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언뜻 보면 미국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면서 사람 사정을 많이 봐준다-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정반대로 오로지 동물만! 신경 쓴다-가 더 적합한 설명일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인 게 큰 이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