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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의 먼지 Jan 13. 2024

주전자 같이 생긴 그거.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토스트를 먹으며 하얀 커피잔에 커피를 조르륵 따르고 있다. 그 순간 내 눈에 띈 은색 주전자.

주전자인데 커피가 나오네...? 저건 뭐지...?


 모카포트였다. 커피 만드는 주전자. 커피를 "끓인다"라 표현이 참으로 잘 맞는 커피 기구.


 브랜드도 종류도 많았다. 그중 가장 맘에 드는 모양과 소재를 골라 결제를 하고 원두도 모카포트 분쇄로 주문해서 기다렸다. 새로운 취미의 탄생이었다. 그 후 어떻게 하면 모카포트로 맛있게 커피를 내릴 수 있는지 연구하고 공부를 했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오면 어김없이 모카포트를 들었다. 


 보일러에 배꼽 아래까지 물을 채운다. 바스켓이라고 불리는 깔때기 모양의 작은 통에 커피 가루를 넣고 토닥토닥 살짝 다져준다. 잘 잠가주고 가스렌지에 올려주면 준비는 끝이다. 자, 여기서부터 집중해야 한다. 보일러 안의 물이 끓어오를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린다. 물이 끓어오르고 커피를 적시는 그 몇 초. 추가 달려있던 모카포트에서 치치-소리가 난다. 추를 숟가락으로 땡! 하고 때려주면 쿠와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추출된다. 고요하던 집을 커피향이 요란하게 가득 메운다. 향은 숨길 수가 없다. 방에 계시던 엄마 아빠가 식탁에 앉으신다. 밤이니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갓 내린 커피 약간, 설탕을 조금 타서 건넨다. 달큰하고 따듯한 밤이다. 


 주말에는 모카포트로 커피를 잔뜩 내린다. 그리고 얼음틀에 넣고 얼린다. 급할 때를 위해 얼려두는 비상용 커피다. 아이스 라테를 만들어 먹을 때도 좋았다. 이 메뉴는 훗날 '큐브라테'라고 불리는 음료가 되었다. 아무튼, 모카포트는 여러모로 유용했다. 따로 전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물을 따로 끓이지 않아도 그냥 커피가 나온다니, 작은 커피 자판기 같았다. 모양도 예쁘고 기능적으로도 우수한 이 "커피 나오는 주전자"는 감성이 중요했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커피를 취미로든, 일로든 가장 즐겁게 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모카포트다. 커피 향이 퍼지는 게 눈으로 보인다고 착각할 만큼 드라마틱 하게 공기의 색을 바꾸고 위로를 안겨줬던 시간. 조용히 내 방의 스탠드를 켜고 가장 좋아하는 책과 함께 커피를 즐겼던 그 많은 밤들. 모카포트에는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의 향도 함께 고여있다. 커피를 일로 시작하고 나선 집에서 도통 모카포트를 손에 쥐는 일이 없어졌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는 모카포트에게 슬쩍 눈인사를 건넨다. 우리가 다시 맞출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화답한다. 


오랜만에 이번 주말은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를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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