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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의 먼지 Dec 15. 2023

아무 커피나 안 드시겠네요?

 13년 차 바리스타. 솔직히 13년 차인지, 14년 차인지 정확하지 않다. 어느샌가 경력 세는걸 까먹었다. 연차 쌓이는 거. 그거 별로 소용없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업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커피 오래 하셨으면 아무 커피나 안 드시겠네요?"

"저 스벅 골드에요. 저가 커피도 잘 마십니다. 초코에몽도 좋아해요."

미슐랭 별 받은 쉐프님들도 집에서는 라면도 드시고 편의점 도시락도 드신답니다.


 아무 커피.

 그렇담 좋은 커피의 기준은 뭘까? 좋은 환경과 철저한 관리 감독하에 재배된 원두를 숙련된 로스터와 바리스타가 만든 커피일까? 아니면 커피 맛집이라고 소문난 유명한 카페의 커피일까? 특정 지역, 특정 농장의 커피일까? 나는 상황에 맞는 커피가 '오늘의 가장 좋은 커피'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단 걸 먹고 싶어. 하는 날은 주저 없이 핫초코에 샷추가를 한다. 숙취가 심한 다음날은 무조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내 사물함에는 언제나 '맥심 모카골드'가 박스째로 있었다. 유명한 로스터리 카페에서 일하는데 대체 왜?라고 할 수 있다. 맞다. 일하면서 계속 맛을 보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신다. 아...그런데, 믹스커피 2봉에 얼음 딱! 타서 한 입 쫙! 하는 걸 포기 할 수 없어서...라는 간단한 답이 나온다. 오죽하면 개인 카페에서 '다방커피' 혹은 '맥심커피'라는 메뉴로 판매를 할까. A**크래커를 푹 찍어 먹는 맛은 또 어떻고!


 "브루잉 커피 아무거나 주세요."

주문을 받는데 되려 물음표로 다가왔다. 일단 당황하지 않고 손님의 취향을 살핀다. 취향을 살피는 일은 알고리즘 같아서 일단 스무고개로 시작한다. "산미 있는 거 좋아하세요?"로 첫 질문을 한다. Yes/no로 의사 표시를 한 뒤, 몇 개의 질문을 더 거치면 드디어 이상형 월드컵의 끝이 보인다. "분명 마음에 드실거에요."라는 멘트를 덧붙인다. 커피를 내고 충분히 즐기는 모습을 보곤 다시 묻는다. "입맛에 좀 맞으신가요?"

그렇게 그날의 '아무 커피'는 '내 취향의 커피'가 된다. 아무거나가 특별함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약간 쌀쌀한 12월의 날씨다. 

한길은 자고 있던 나를 깨워 등산을 가자고 보챈다. 눈도 못 뜬 채 주섬주섬 옷을 입고 가벼운 등산을 한다. 기분 좋게 하산하는 길. 여기서 커피가 안 땡길 수 없지! 마침 아메리카노가 무려 1.400원. 샷 추가 하면 2000원인 대형 프렌차이즈를 발견했다. 한길은 아메리카노, 나는 따뜻한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다. 코끝은 찬데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달한 바닐라 라테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오오.. 갑자기 삶이 아름답다. 지구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 아, 등산하고 따바라(따뜻한 바닐라라테의 줄인 말.) 먹으려고 사는 거네. 집에 돌아가는 10분 동안 깔깔 거리며 이 행복감에 대해 재잘재잘 얘길 나눈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며칠 동안 생동감을 얻고 살아갈 이유가 명확해진다. 


'아무거나'란 뭘까?

언제든 좋은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것? 기대하지 않는 것? 뭐 대충 그냥 그런 것?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무'라는 건, 갑자기 내 삶에 들어와 언제든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히든카드 같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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