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의 먼지 Dec 15. 2023

저는 둘둘둘이요.

삐-익

 주전자 끓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붉은 덩굴 장미가 그려진 커피잔에 툭툭툭 커피, 프림, 설탕을 넣는다. 뜨거운 물을 붓곤 티스푼을 나에게 건넨다. 나는 숟가락을 찔러 넣고 가만히 젓는다. 동글동글 돌아가며 점점 작아지는 커피 알갱이를 구경하며 달큰하고 꼬수운 그 향을 느낀다. 그리곤 엄마 몰래 숟가락에 묻은 커피를 맛본다. 윽, 쓰다. 쓰고 조금 달다. 이런 걸 어른들은 왜 먹지? 아까보단 조금 더 많이 커피가 고여 있는 숟가락을 또 맛본다. 쓴데, 달다. 또 맛보고 싶다. "애들은 커피 먹는 거 아니야!" 금세 불호령이 떨어진다. 티타임이 끝난 후 커피가 말라붙은 잔을 들어 어른 흉내를 내본다. 잔 깊숙 코를 밀어 넣어 차게 식은 향에 파묻힌다. 더 달콤해졌다. '내가 어른이 되면 커피 맨날 마실 거야!' 그리고 그 꼬맹이는 커피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엄마! 커피 만만세에요!


 커피에 대한 첫 기억이다. 스틱 커피 시대 전인 인스턴트커피. 작은 유리병엔 커피, 설탕, 프림이 각각 담겨 있었다. 커다란 본래의 유리병엔 갈색의 굵은 커피 알갱이들이 있었는데 빨간 뚜껑을 드르륵-드르륵 여는 소리가 좋았다. 애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어른들의 소리였다. 그 둔탁한 소리가 좋아 엄마 몰래 열었다, 닫았다 하기도 했다. 집집마다 소분 용기도 달랐는데 도자기 재질에 스푼까지 셋트로 달려있는 것도 있었고 가벼운 게 최고라며 간편한 플라스틱 통을 쓰는 집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입구가 넓은 잼 병 같은 걸 많이 썼다.


 [영화 -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명절에 친척 집에 모이면 식사 후 어른들은 항상 커피를 마셨다. 쟁반에 커피, 설탕, 프림을 두면 각자 취향에 맞게 커피를 탔다. 열 명이 모이면 커피 10잔의 맛은 다 달랐다. 엄마의 형제들은 커피잔이 바뀌어도 이게 누구의 커피인지 귀신같이 맞히곤 했다. 엄마는 2:2:2, 아빠는 설탕을 하나 더 넣은 2:3:2를 좋아했다. 외할머니는 1:3:2로 연하고 달달하고 부드러운 커피를 드셨다. 그렇다. 스타벅스의 사이렌 오더가 있기 전, 한국인들은 이미 각자 마음속에 품은 레시피가 있었던 거다! 게다가 커피를 만드는 재료가 똑같이 떨어질 리 없다. 프림이 똑떨어졌다거나 1.5인분의 커피 양만 남았다면 당장 슈퍼마켓으로 달려가야 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커피 한 잔 먹자고 구비하고 해야 할 행동들이 많았다.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딱! 딱! 하면 화려하고 멋진 음료들이 저절로 뿅!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침내 나만의 인스턴트 커피 취향이 만들어 지는것이었다. 어른들이 커피 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능숙하고 멋있었다. 데이트할 땐 이런 질문을 하게 될까? "커피 취향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둘둘둘이요."


 기억 속에 인스턴트커피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개취 존중의 시대, 그리고 아주 고집스러운 커피 취향의 시대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