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의 몸 이야기]
나는 타고난 흥부자였다. 기분이 좋으면 늘 들썩들썩 춤을 췄다. 아이를 낳고 보니 타고난 흥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 둘 다 몸을 일으켜 서기도 전부터 리듬을 탈 줄 알았다. 인간의 본능인 건지, 유독 흥이 많은 유전자를 보유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 가족에게 신명은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기본 장착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무대만 있으면 나가서 춤을 췄다. 유치원생 시절 곱게 화장하고 족두리 쓰고 한복 입고 꼭두각시 춤을 추기도 했고 디스코 음악에 맞춰 찌르기 춤을 추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몸쓰기도 좋아하니 춤을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특별활동이 시작되자 우주소년단에 가입했다. 각종 과학실험을 하고 우주 관련 캠프를 간다기에 모인 아이들이었지만 우주소년단도 수련회를 가면 캠프파이어 피워놓고 장기 자랑을 했다. 낮에는 짜인 프로그램대로 나무젓가락으로 달걀 감싸는 비행 물체를 고안해서 만들고, 물로켓 쏘고, 개구리 해부를 하고, 우주 정거장 모형을 만들다가도 쉬는 시간만 생기면 춤 연습을 했다. 그때 연습한 잼의 ‘난 멈추지 않는다’ 춤을 나는 아직도 그대로 출 수 있다. 수련회 가기 전 춤 연습을 모여서 했던 선배 언니의 집 거실도 아직 눈앞에 생생하다. 우리는 초코파이를 간식으로 먹으면서 대형을 짜고 안무를 익혔다.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 다시 곡의 맨 처음으로 돌리기 위해 되감기를 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학교에서 춤 잘 추기로 유명했던 선배 오빠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맞춰 화려한 스핀을 선보였는데 춤에 심취한 나머지 캠프파이어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것도 몰라서 선생님들이 뛰어들어 오빠를 구해냈다. 보이 스카우트, 걸 스카우트, 아람단의 수련회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학예회, 장기자랑이 혼자 나가서 노래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웃긴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삼삼오오 연습한 춤을 추는 무대로 바뀐 것도 초등 고학년부터다.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은 뉴키즈온더블록 같은 팝스타들의 테이프를 가져와서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안무는 마음대로 짜깁기했다. 학교 옆 공원에서 휴대용 카세트 오디오로 음악을 틀어놓고 모여서 춤을 추는 그룹이 여럿 있었다. 가요 프로그램 방영 시간이 되면 비디오 플레이어에 공테이프를 넣고 녹화를 했다. 동생과 녹화본을 돌려보면서 춤을 따라췄다. 방이 좁아서 둘이 춤추다 어딘가에 부딪치기 일쑤였지만 땀이 날 때까지 웃으며 춤을 췄다.
중학생이 되었다.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였다. 수련회 장기 자랑에서 이 곡을 추고 싶은 학생이 너무 많아서 담임은 특단의 조치로 음악실을 빌려 오디션을 열었다. 반 친구들의 투표로 새로운 팀을 짜서 우리 반 대표로 내보내자고 했다. 무려 네 팀이 오디션을 봤다. 투표 결과 4위 안에 들어야 반 대표로 나갈 수 있는데 다행히 나는 순위권에 들었다. 그런데 다른 팀의 떨어진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 팀에서 순위권에 뽑힌 친구들마저 새로운 팀으로는 장기 자랑에 나가지 않겠다며 같이 울기 시작했다. 여중생은 누가 옆에서 울면 따라서 울 나이다. 갑자기 반 친구들 대부분이 울기 시작했다. 떨어진 아이가 불쌍하다며, 우는 아이가 있는 팀을 그대로 우리 반 대표로 내보내자고 여론이 모였다. 우는 아이 떡 하나 준다는 말을 이때 체감했다. 눈물의 회의 내내 울지 않은 건 나 하나였다.
나름 민주적인 방식으로 장기 자랑 팀을 정해보려던 담임은 우는 아이가 있는 팀이 반 대표로 나가라고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 순간부터 내가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엉덩이 때리는 춤을 연습했는데, 심지어 투표로 인정(認定)까지 받았는데, 인정(人情)에 밀려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다니 분통이 터졌다. 담임은 다음 수업 담당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나를 상담실로 데리고 가서 한 시간 동안 달래주었다. 데뷔 멤버를 뽑는 아이돌 오디션도 아니고, 심사위원도 반 아이들일 뿐인 작은 이벤트지만 중학생에게 수련회 무대는 그만큼 중요했다. 비록 무대에 서지는 못했지만 무려 한 시간 내내 서러움을 듣고 다독여준 선생님의 따뜻함만은 오래 남았다. 그리고 1년 뒤 룰라의 '3, 4'로 여름 캠프 장기 자랑 무대에서 채리나 파트를 추며 한을 풀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사촌 오빠가 한국무용을 전공한 여자친구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 언니는 어른들이 불편해서인지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며 친한 척을 했고 급기야는 “무용하면 참 잘할 몸인데 생각 없어?”라며 허파에 바람을 넣었다. 안 그래도 집 앞 상가 2층에 무용 학원이 있어서 궁금한 마음에 살짝 구경하고 내려오곤 했던 차였다. 엄마한테 무용 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내가 미술 학원에, 플루트 학원에, 바이올린 학원에 가고 싶다고 조를 때와 마찬가지로 단칼에 거절했다. “돈 없어!”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조금 진득하게 졸랐던지 엄마가 조건을 걸었다. “기말고사에서 평균 95점이 넘으면 보내줄게.” 그렇다. 엄마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나는 당연히 95점을 넘지 못했다. 고작 그 정도 열망이었던 게다. 춤은 학원을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출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