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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제 본느 May 28. 2020

결혼을 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왜 난 늘 미안해했을까

모든 게 내 탓이었다.

결혼하면 여자가 불리할 거란 걸 몰랐던 것조차 내 잘못이라 여겼다.


"애 얼굴이 왜 이래?"

"넘어졌지. 놀이터에서 놀다가"

"넌 뭐했는데?"

"옆에 있었지. 너무 한순간에 넘어져버려서 못 잡았어"


아이들을 조금 더 잘 돌보지 못해 늘 미안했고 아이가 예민하게 굴 때면 내가 태교를 잘못해서라고 자책했다.


"내 셔츠 찾았어?"

"아, 깜박했다. 미안해"


세탁소에 옷을 깜박하고 맡기지 못해도 나는 남편에게 미안해했고 양말이 한 짝씩 꼭 없어져도 미안해했다. 가사도우미 이모님이 니트를 세탁기를 돌려버려도, 친정엄마가 아이를 보시다 다쳐도 내 탓으로 돌렸다.


"집이 왜 이래? 오늘 뭐했어?"

"..."


집이 어질러져있으면 남편은 나의 하루 일과를 취조하듯이 물었다. 하루라도 편하게 쉬던 날이 있었을까. 집이 이 정도로 엉망인 건 그만큼 그날 하루가 엉망이었다는 신호인걸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알아주는 것 까진 바라지 않으나 나를 하루 종일 편히 놀고먹은 사람 취급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애들이 편식하는건 너가 반찬을 안해서야. 너가 반찬 하는걸 한번도 못봤어"

"그럼 애들은 뭐먹고 살았을까? 여태까지"

"남들은 반찬 세네가지 놓고 먹더라. 난 그정도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럼 니가 만드시던가"

"도대체 잘하는게 뭐야. 육아도 못해 요리도 못해 청소도 안해."

"그래! 나 잘하는거 하나없다!!!"


솔직히 나는 한그릇밥을 좋아한다. 간편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야채를 잘 섞어서 골고루 먹이기에도 좋다. 국물은 염분이 높아 되도록이면 자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국없이 밥이 안넘어간다는 40대의 대한민국 남자였다. 7첩반상은 아니어도 국과 반찬들이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을 좋아하는 78년생 한국남자.


아무리 내가 한그릇 밥을 좋아하고 국을 지양한다 해도 결혼 4년차인데 아무렴 반찬 한번을 안만들었을까? 더이상 이런 유치한 싸움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아이의 양육 방식부터 살림의 방식까지 그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가 원하는 모든 방식대로 가정이 꾸려지기를 바랐다. 남편의 사고방식은 나에게 먼지가 한 겹 한 겹 쌓이 듯 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고 나조차 나를 몰아세우도록 만들었다.


'난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인간인것인가'
 
우울감이 밀려오며 무기력해졌다. 남편의 말들이 나를 짓누르게 되자 나는 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서운함을 느끼는 부분이 어떤 지점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니 남편에게 요구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다. 나를 억누르려는 남편의 행동에 억울하고 분했지만 내 위에 쌓인 먼지 더미가 너무 무거워 걷어낼 힘이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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