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국 책 읽기
인생에서 만났던 그리고 만나고 있는 여러 가지 구덩이들을 떠올리게 한 소설이었다.
어쩌면 구멍 사이로 잃어버리고도 잊어버리며 사는 어떤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한 이야기였다.
편혜영,「홀(The Hole)」, 문학과 지성사, 2016
소설의 제목이 ‘The Hole’이다.
처음에 제목을 읽고 어떤 '구멍'에 대한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소설은 대학교수인 오기가 아내와 여행을 가는 중 사고를 당한 후 병원 침대에서 의식을 회복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몸을 거동할 수 없게 된 오기가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진 후 자신을 돌봐줄 유일한 사람인 장모와 지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랑했지만 서로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마음이 흘러갔던 오기와 그 아내 사이의 일들을 알게 된 장모는 꼼짝할 수 없는 오기가 안간힘을 쓰며 다시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몸부림을 냉정하게 막는다. 마치 죽은 딸이 세상과의 단절에 갇혔던 것처럼 오기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집 안에 가두어 세상과 단절시킨다. 아내가 남긴 글들을 통해 오기가 알 수 없는 아내의 생각이나 감정의 끝부분까지 마음에 담은 장모는 점점 섬뜩하게 오기를 옥죄었다. 결국 오기가 자신의 정원에 장모가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끔은 병원 침대에서 꼼짝을 못 하던 오기의 생각이 현실처럼 다가오는 때가 있다. 아마도 나름 잘 나가던 대학교수가 순식간에 불구자가 되어 자신을 미워하게 될 장모의 손에 의탁해야 되는 삶의 나락에 떨어졌으니 오기의 마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불행 가운데 빠져서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모양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아픔과 슬픔에는 극도의 집착을 보이는 그런 존재 말이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구덩이 속에서의 오기의 모습을 끝으로 소설은 끝났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제목인 "The hole"은 구멍일 수도 있고 구덩이를 뜻할 수도 있겠다고.
장모가 딸에 대한 슬픔을 묻는 기분으로 팠을 구덩이일 수도 있고
마지막에 주인공 오기가 빠져서 눈물을 흘리던 구덩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의 인생에 뚫린 구멍, 커다랗고 다시는 메꾸어지지 않을 인생의 구멍일 수도 있다.
아내가 사라진 구멍, 교수의 직책을 잃은 구멍 그리고 일상적인 삶이 사라진 구멍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소설 속에서 침대 위에서 꼼짝할 수 없는 몸으로 삶을 찾으려 애쓰는 오기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간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구덩이가 너무 깊고 깊어서 결고 기어 나올 수 없었던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른 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구덩이 밖으로 나와 있는 때도 있었다.
가끔은 구덩이 안에서 버둥대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잡아당겨주어서 구덩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 많은 구덩이를 지나고도 나는 여전히 구덩이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마음을 빠뜨린 채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그리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수많은 구멍들, 그 사이로 빠져나간 소중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구멍 사이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들 중에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삶에 숭숭 난 구멍들을 잘 살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하리라.
궁금하다.
오기는 과연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