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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들

남다른 아이들과의 삶을 함께한 '남들과 다르지 않은' 동료 교사들

by 날마다 소풍

우리 학교에서는 “Mrs."또는 "Miss”라는 호칭 대신 “Ms.”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고 서로의 사적인 상황을 모르더라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우리 특수학급 담임 Ms. R은 방학이 시작될 무렵 배가 수박만 해진 임신부였다. 처음 만났을 때, 모델처럼 키가 커서 나는 배에 주목하지 못했는데 한참 지나서, 임신했다고 Coming Out을 했다. 그제야 나는 ‘어쩐지 점점 배가 나오더라’ 생각했다. 아이를 둘이나 낳은 사람이 그런 것도 눈치를 못 채다니…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담임교사의 사정을 살피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Ms. R이 남다른 아이들을 다루는 첫 번째 전략은 “Yes means Yes, No Means No”였다. 방금 이야기를 했는데 잠시 후 자기 심사에 뒤틀리면 딴 이야기를 하며 그러네 아니네 징징대는 아이에게 Ms. R 은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No!”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 투정을 부리는 남다른 아이에게 그녀는 말한다. “No Means No”. 입술을 삐죽 내민 남다른 아이… 자리로 돌아간다. The End.

Ms. R의 두 번째 전략은 “I said so.”였다. 오늘도 남다른 아이는 와서 자기는 이렇게 하고 싶다 저건 싫다며 왜 해야 하냐고 떼를 쓴다. 그 아이의 눈을 또바로 보며 딱 한마디 한다. “I said so.” 그리고 하던 수업으로 돌아간다. 온인상을 찌푸린 남다른 아이 발을 쿵쿵대며… 결국 자리로 돌아간다. The End.

초임 보조교사인 내가 볼 때, Ms. R은 임신 초 입덧과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가지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남다른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녀가 모든 생각 다 잊고 방학 동안 열심히 뱃속의 아기를 건강하게 키웠기를……



나와 같은 Full Time 보조교사 Ms. T는 베트남계 중국인으로 미국으로 대학을 와서 중국 만다린어와 캔토니어, 베트남어, 그리고 억양은 다소 있지만 영어, 네 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보험 계통에서 일하다가 아이 때문에 그만두었다가 보조교사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몇십 년은 특수학급에서 일한 듯 아주 능숙하게 아이들의 마음을 잘 휘어잡았다. 가끔은 사탕이나 애벌레 젤리로, 가끔은 단호하고 냉정한 태도로 아이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따뜻한 Ms. T를 우리 반 아이들은 무척 잘 따랐다. Ms. R은 항상 Ms. T가 자기의 오른팔이라고 했다. 그런 Ms. T에게서 나는 남다른 아이들과 잘 사는 기술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울렁 더울렁 사는 생활이지만, 편안함이 아닌 늘 패션모델처럼 멋지게 옷을 차려입는 그녀를 보며 나는 흐트러지지 않는 프로페셔널한 직업 정신에 감탄했다. 게다가 Ms. T는 내가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체육시간에 굽이 있는 신을 신고도 아이들과 공을 뻥뻥 차는 고도의 능력과 운동장에서 항상 에너지 넘치는 체력이 존경스러운 동료였다.

세 명의 Part Time보조교사 중 아침 시간을 담담하는 Ms. W는 차가운 면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은 Ms. W와 공부할 때 꼼짝을 못 하였다. 교사 자격증이 있으면서도 아이들 키우면서 잠깐 일하는 이 일이 좋다며, 정규교사는 하고 싶지 않다는 Ms. W. 나는 자기에게 맡겨진 것은 완벽하게 하면서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자유로우면서 화통한 성격이 진짜 “Cool!”하다고 종종 생각했다.


Ms. S는 결혼한 딸과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합해 5명의 아이를 가진 슈퍼맘이었다. 대학 다니는 두 딸 때문에 보조교사를 하고 있다는 Ms. S는 마음이 약해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마음이 편한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이 다섯 낳아 키우느라 무릎이 아파서 절뚝거리면서도 징징대는 아이들 시중을 다 들어주는 “진짜 엄마”같은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따뜻함이 나에게도 전염되길 바랐다.


뉴욕에서 자라 늘 동부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Ms. D는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이 자폐가 있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Ms. D는 자기 큰 아이가 자폐가 있음에도 고등학교까지 잘 교육시켜준 미국 특수교육 시스템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유사한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서 특수학급 보조교사를 시작했다. 나는 아들과 자기가 겪어왔기 때문에 남다른 아이들의 문제 상황과 그 아이들이 앞으로 경험할 일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Ms. D의 사려 깊음에 감동하곤 했다.




특수학급에서 일하면서 나는 남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지만 함께 일했던 동료 교사들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풍요롭다고 부러워하는 미국인으로 살아왔지만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눠주기 위해 교실을 지키는 그들의 마음과 실천하는 나눔에 감동을 느끼곤 했다.

그들이 건강한 생각과 따뜻한 마음을 떠올리니 특수학급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는 나의 중심은 무엇일까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시작은 내가 사라지고 가족을 위한 삶만 남는 것 같은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정체된 삶에서 “나”의 가치를 찾기 위해 출발한 “나 “ 중심의 이기적이었을지 모를 나의 시작이 “남”의 가치도 찾아주는 좀 더 넓고 깊은 발걸음이 될 때가 오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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