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재이는 어느새 재이의 방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조금 전 있었던 광주의 일들이 머릿속에 또렷이 되살아났다.
처참하게 쓰러져 가던 광주시민들, 버스 위에서 구호를 외치던 동하. 총에 맞고 쓰러진 동하의 따스했던 체온. 재이의 손을 잡던 동하의 떨리는 손.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재이는 기가 막히고 답답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직도 동하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동하를 지키던 도청 안 상황실.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태극기가 덮인 시신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동하 엄마.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유가족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아우성 속에 끈적끈적하게 이어지던 유족들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재이의 귓가에 되풀이되어 울렸다.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들을 실제로 본 재이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아가 치밀어올라 침대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말도 안 돼! 이게 우리나라 맞아?”
“가슴 아픈 일이지.”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재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집엔 재이 혼자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재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텔레비전도 틀지 않았고 라디오도 없는데 이상했다.
“잊어버려!”
놀란 재이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방문을 열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침대 위에 이불을 들춰보아도, 침대 아래에도 아무도 없었다.
재이는 소리 나는 곳을 따라 방안을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어쩔 수 없어."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펜던트. 책상 위에 둔 발 모양의 구리 펜던트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너, 말할 줄 알아?”
재이는 깜짝 놀라 펜던트를 향해 물었다.
“물론이지.”
펜던트 안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지?”
“난 말하는 펜던트야. 다른 사람에겐 못하고 주인에게만 할 수 있지.”
너무 신기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럼 내 방을 숲으로 변하게 하고, 시간의 숲에 가게 한 것도 네가 한 거야?”
“맞아.”
“어떻게 그런 마법을 부릴 수가 있어?”
“음, 그건 마법사님이 나에게 마법의 기운을 집어넣어 펜던트를 만들었지. 그 마법사님은 죽었고, 난 길가에 버려져 있다가 너에게로 오게 된 거야.”
구리 펜던트를 닦을 때마다 재이의 방은 숲으로 바뀌었고, 최루탄 냄새가 퍼지는 광주 시내로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는 홀린 듯한 상황에 재이는 당황스러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펜던트의 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재이의 머릿속에 반짝 스치는 게 있었다.
“그럼 너,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어?”
“그거야 식은 죽 먹기지. 마법사님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도 바로 그거고. 그런데 그건 왜?”
“혹시, 그럼...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전으로, 동하가 죽지 않았던 그때로 돌릴 수 있어?”
“그러니까 리셋하라는 말이지?”
“맞아! 바로 그거야!”
펜던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거 할 수 있긴 한데.”
“그게 가능하다고?”
“요번 딱 한 번 만이야! 자꾸 되돌려달라고 하면 곤란해.”
“그래, 알았어. 약속 지킬게. 그럼 동하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거지?”
“당연하지. 근데 일 년 전으로 갈까? 6개월 전으로 갈까?”
“일 년? 아, 아니. 6개월 전이 좋겠어.”
“알았어. 6개월 전으로 할게.”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재이는 눈물이 날 것처럼 기뻤다.
심장이 쿵쿵 방망이질을 해댔다.
“그래. 요번 딱 한 번 뿐이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네가 나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봐. 그럼 네 방은 시간의 숲으로 변할 거고, 그때 그 숲으로 가. 그럼 1979년 겨울로 돌아가 있을 거야.”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재이는 너무 기뻤다. 발 모양의 펜던트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윤이 반짝 나게 닦았다.
재이가 펜던트를 닦자 재이의 방은 또다시 숲으로 변했다.
이번엔 추운 겨울 숲이었다. 숲 속은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재이는 겨울 옷으로 갈아입고 털장갑과 모자를 뒤집어썼다.
천천히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앙상한 나무들이 새하얀 눈에 덮인 숲 속은 온통 눈에 파묻힌 하얀 나라였다.
날씨는 추웠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다.
재이는 쌓인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멀리 오두막집이 보였다.
오두막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쌓인 눈 속을 젖히며 오두막집을 향해 뛰어갔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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