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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Oct 20. 2024

사랑을 잃고 바닷길을 떠도네

2부/ 그렇게 세월의 강은 흐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 빈집 > -



절필을 다짐하면서 밤을 새웠다.

앞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은 그가 떠난 지 40여 일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아이들과 먹고살아야 하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넋 놓고 누워만 있는 나에게 큰아들이 내 가슴에 기대며 울었다. 

엄마 이제 일어나. 이제 일어나야 해. 우리를 봐서라도 힘을 내, 엄마. 

내가 뭐 특별히 알아주는 작가도 아닌데, 막상 글을 쓰지 못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 밤 시인 기형도의 시를 읽다 보니 그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 


잘.있.거.라.더.이.상.내.것.이.아.닌.열.망.들.아. 

그 부분을 읽으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의 글쓰기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에 불과했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아무도 없는 집안 공기는 칙칙하고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실문을 열어젖혔다. 무거운 실내 공기가 문밖으로 밀려 나가는 듯했다. 다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창문 가득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 몽롱했던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가슴속이 바윗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땅속에 붉은 마그마가 터지듯, 이대로 있다간 가슴이 펑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휴대폰으로 불에 덴 것처럼 급히 제주행 항공권을 검색했다. 마침 오후 1시 항공권이 남아 있었다. 제주 올레길 코스와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하고 속전속결로 숙소를 예약했다.

이런 힘이 어디서 솟아났을까.

서둘러 배낭을 챙겨 메고 쫓기듯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는 한 시간 만에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입구에서 아들에게 문자를 보낸 뒤, 버스를 타고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제주 올레 사이트를 검색했다. 

안내판을 따라 곧바로 올레길 코스를 찾았다. 올레길 입구에 들어서자 혼자 걷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어서 그런지 바닥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입구에서부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걷고 싶었다. 걷다 보면 무슨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아니 해답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걷다 보면, 힘들게 몸을 혹사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 걸으며 머릿속을 텅 비우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

마음 밑바닥에 그 생각만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 세상 불행이 나에게만 달라붙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걸음을 재촉했다. 떨쳐버리려 해도 앞으로 살아갈 걱정이 다시 나를 옭아맸다. 그것은 나를 한시도 놔주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오름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왔지만, 더욱 속도를 냈다. 땀방울이 등을 타고 툭툭 흘러내렸다.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 오름 전체를 노란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 같았다. 해풍에 젖은 찝찔한 바람이 얼굴과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 그와 같은 색의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청색 모자를 눌러쓴, 키도 꼭 그만하고, 얼굴에 약간의 우수를 띠고 걸어오는 남자. 난 그가 살아서 내게로 걸어오는 것 같아 너무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몸이 굳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 남자는 무심코 나를 지나 등을 보이며 스쳐갔다. 나는 쫓아가 그 남자를 붙들고 싶었다. 뛰어가 한껏 그 남자 품에 안기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마음뿐,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얼마쯤 지나자 그가 숲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멀리 푸른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떠나고 났는데도, 나는 왠지 그가 머나먼 출장을 끝내고 돌아올 것만 같았다. 떠난 그를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로는 그가 떠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기별 없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무심한 얼굴로 들어설 것만 같고, 안방 화장실에서 말갛게 씻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 배고파, 할 것 같았다. 항상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그가 정말 떠났다는 생각이 들면 팽팽했던 고무줄이 툭 끊기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적막감이 사무치게 전해져 왔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좀 더 잘해줄걸. 그가 떠나고 나자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시시콜콜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를 내 방식대로 고쳐놓으려 했던 점. 한 달 내내 수고하여 벌어온 월급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빠져나가 버리는 현실을 불평만 했다. 

둥그스름하고 평평한 구릉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다. 앞이 뻥 뚫려 있어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무도 없는 오름 위 벌판에 노랗게 깔려있는 이름 모를 꽃무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 천지간 어디에도 내편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쏟아졌다. 


한참 동안 울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고 있진 않아. 다 너만큼 힘들어. 어쩌면 너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몰라. 단지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너무 엄살떨지 마. 누구나 다 힘든 삶을 버티며 살고 있는 거란다.

너, 이제부터 열심히 살면 돼. 그동안도 잘 해냈잖아. 괜찮아, 괜찮아. 잘할 수 있어. 힘내! 

넓고 장엄한 바다가 파도를 철썩이며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무심한 그 바다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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