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 기차
큰일 났다. 대구로 가는 기차표가 한 장도 없다. 평일이라 좀 느긋하게 일을 보고 표를 끊으려고 했는데
아뿔싸 이럴 수가, 표가 다 매진이다. 그렇다고 버스터미널로 갈 힘도 없어서, 그냥 기차에 올라버렸다.
혹시나 기차 연결선에 자리가 있는지 다녀본다. 저 뒤 18호에 가서야 겨우 한자리 있다. 직원이 오면 이실직고하고 벌금을 물고라도 집에는 가야 한다. 기차가 출발하고 죄송하다며 넘치는 계산을 치르고 편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열차 안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어, 여기선 뷰가 더 크다는 만족 하며 눈을 감는다.
어느 사이 나는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가는 열차 안이다. 예전부터 시베리아 대륙 열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50이 되어 꿈을 이루게 되었다. 겨울의 바이칼로 가는 길, 몽골의 메케한 공기를 뚫고 기차 문이 열린다. 단체로 가는 여행이어서 한 룸에 4명씩 배정되었다. 전날 한방을 같이 쓰던 룸메이트와 전라도 이리에서 온 부부랑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2층 침대는 늘 동경이었는데 드디어 올라가 보는구나. 속으로 ‘야호’ 하면서 재빨리 올라갔다. 와우! 조금 올라간 것 같은데 무지 높고 약간 아찔하다. 일단 자리 찜을 해두고 복도로 나갔다.
워낙 차가운 날씨이고 밤새 달려가야 하므로 기차 안은 열기가 후끈하고, 복도에 마련된 뜨거운 물에서는 김이 술술 나온다. 기차 밖에서도 하얀 김들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몽골에서는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러시아 국경을 통과하면서 바깥의 풍경이 점 점 더 백색의 겨울 왕국으로 들어간다.
대구에 살아서 눈 같은 눈은 만나기 힘들어서 자못 기대가 크다. 바이칼은 영하 30~40도 된다는데 그 체감이 어떨지도 궁금하다. 러시아로 들어갈수록 더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 것 같다. 여행객들도 상기된 표정으로 바깥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러시아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결혼 초 미국을 다녀온 뒤 20여 년이 지난 후라 많이 설렌다. 그것도 밤새 달려가는 기차 안이라니,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다. 여긴 따로 식당칸이 없이 뜨거운 물만 제공되어서 여행의 감초인 컵라면을 맛나게 먹고 서로들 삼삼오오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나는 단체 여행도 처음이고 혼자 따라온 여행이라, 아는 사람도 없이 바깥만 보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기차, 선로를 이어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길도 저렇게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라고 잠시 생각해 본다. 마주하는 낯선 풍경들이 나이가 들수록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 상념도 잠시 눈이 쏟아지듯 뭉텅이로 내린다.
막 뛰어나가서 그 눈을 맞아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 마음을 더 부채질하는 것은 바로 눈부신 자작나무의 출현이었다. 한두 그루도 아니고 완전 자작나무 군락지 같다. 그 흰 몸에 더 하얀 눈을 맞으며 자작나무들이 장엄하게 서 있다. 키가 얼마나 큰지 끝이 하늘에 닿은 듯 눈발 속에 숨어있는 듯 그 끝을 알 수 가없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복도에 있으니, 시간이 많이 늦으니 다들 들어가라 한다.
가슴 가득 아쉬움을 안고 자리에 누웠다. 쉬이 잠을 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웬걸 나는 코까지 골며 그 방 안의 사람들에게 잠 못 드는 밤을 선물했나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만 잘 자고 일어났다. 사람들이 점잖아서 그날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기차에서 대형 버스로 또 얼음 위를 달리는 지프를 타고 시베리아의 진주를 만나러 갔다. 우리 민족의 '시원지'라고도 하는 곳이라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 차가운 얼음 위에 앉아 명상도 하고 한 곳을 드릴로 깊게 파서 물을 떠서 먹어보라 했다. 호수의 크기는 세계 7번 째지만 깊이로는 1위란다. 정말 얼마나 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든지 그 청량감이 잊히질 않는다. 며칠 꿈같은 시간을 바이칼에서 보내고 다시 열차에 올랐다.
룸메이트가 살짝 보자 한다.
“오늘은 반듯하게 자지 말고 옆으로 좀 자면 어때?”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러시아 들어오던 날 이방 사람들이 아무도 못 잤어…. 코를 좀 골더라고.”
“정말요? 좀 깨우지요. 난 전혀 몰랐어요.” 완전 낯이 다 익어버리는 줄 알았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내가 왜 조심하지 않았지? 남편이 ‘너 피곤하면 코 곤다.’는 말을 예사로 들었는데
정말이었구나…. 그 밤을 어찌 보냈는지.
지금도 시베리아대륙열차 하면 눈 덮인 자작나무를 능가하는 충격이 ‘코를 골면서 반듯하게 잔다’라는 말이다. 덕분에 나는 흰 설원을 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갑자기 쿵 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다행히 옆에 아무도 없다. 아, 집에 가고 있구나.. 여기는 창밖이 깜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