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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희건이나비 Nov 15. 2024

하염없이 비는 내리고

글제: 부모님

  해거름에 전화벨이 울린다. 서울에 있는 막냇동생 산바라지하러 가신 엄마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린다.

”미희야 놀라지 마라. 아버지가 오늘 서울 올라오시는 길에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뭐라고요? 아침에 역에 모셔다 드렸는데, 어디 아픈 데도 없었어,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흥분을 하니

마침 옆에 있던 남편이 전화기를 낚아챈다.

 “장모님 다시 한번 알려주십시오. 뭐라 하셨습니까?” 엄마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셨다.

“대구에 너희들밖에 없고, 장례를 서울서 치를 수는 없으니, 장례식장을 구해서 연락하게.” 하셨다. 


  잊을 수도 없는 그해 2002년, 월드컵대회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그해에 나는 두 분의 장례를 치렀다.

9년을 뇌경색으로 누워계시던 시어머님이 7월 하순에 소천하셨다. 그때 엄마는 서울에 계셔서 아버지만 참석하셨다. 아버지가 혼자 계신다는 걸 알면서도 자주 갈 수가 없었다. 

 식사는 단골집에서 해결하니 걱정 말라하셨고 아버지는 건강해 보였다. 마침, 내가 빚은 만두가 좀 있어서 반찬 몇 가지와 같이 가져다 드렸다. 식물엔 관심이 없는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엄마가 안 계시니 내가 꽃에 물도 준다.” 하시며 화분 하나를 집어 보여주신다.

“신기하더라, 내가 물을 열심히 줬더니 꽃을 피우네.” 하시며 스팟트필름을 보여주신다.

나는 그 당시 꽃가게를 하고 있어서 화원에도 있던 식물이었는데, 정말 뭔 꽃이 피고 지는지 모르던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보고 마음이 짠했다.

‘많이 외로우시구나. 혼자 계셔서 꽃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셨구나.’


지금도 스팟트필름을 보면 그때 꽃을 피웠다고 자랑하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는 갖고 간 냉동 만두로 군만두 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고는 집에 왔다. 다음날 아버지께서 전화가 왔는데,

“내가 물을 너무 많이 부었나 봐 군만두가 물만두가 되었다.” 하시며 웃으신다.

“라면 하나도 못 끓이는데 내가 너무 어려운 걸 알려드렸군요.” 하면서 같이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가 막내 산바라지를 끝내고 혼자 오겠다는데, 아버지는 기어이 서울로 엄마 마중을 가신다고 한다. 간 김에 손주도 보고 싶으신 게 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하시라 하고, 역에 태워드렸다.

“폰이 조금 이상해 전화가 잘 안 되네, 내가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 너무 기다리지 마라” 하신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고, 전화기가 고장 났다 하니 나도 무심히 저녁을 맞이한 것이다.


  아버지가 대구로 오시던 날은 종일 비가 내렸다. 엄마가 같이 엠블런스를 타고 왔다. 아버지는 건설업을 하셔서 비 오는 거 싫어하는데 하늘에서도 비가 뿌리고 내 가슴에도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벌써 20년 전 일이라, 그 당시에는 절에서 49재를 많이 올렸다. 요즘은 초대와 막 재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절에 위임하는 경우도 봤다. 

 우리 5남매는 다 떨어져 있었지만 7번의 재에 다 참석했다. 그 중간에 신기했던 일은 만날 때마다 오늘은 누가 아버지를 꿈에서 봤다 하고 또 다음 주는 다른 동생이 이야기한다. 나도 물론 아버지를 꿈에서 만났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 대명동에 집을 지어서 이사하고 아버지 생신을 마당에서 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정경이 꿈에 나타났다. 아버지의 밝은 모습과 행복해하는 모습이 비치기만 할 뿐 대화는 없었다. 나중에 친척분이 얘기해 주었다. 망자가 마지막을 보지 못한 가족들에게 꿈으로 찾아와서 인사하고 간다고 했다. 

 그렇게 가신 지가 22년이 되었건만 해마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큰 키로 저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셨던 아버지, 지금도 저를 보고 계시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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