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시골에서 살던 애들이 다시 시골로 돌아왔을 때
여러 가지 일로 문경에 예상보다 일찍 내려오게 되면서 바로 농사를 시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귀농에 필요한 교육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했고, 집도 겨우 얻었는데 농사지을 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핑계 삼아 첫해는 좀 쉬어가기로 했다. (*귀농에 관련된 여러 지원을 받으려면 귀농 수업을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남편은 문경이 고향이니 당연히 시골에 살던 애였고, 나는 어릴 적에 판교가 아주 시골일 때 살아서 나 역시 아주 ‘촌’에서 자란 애였다. 지금이야 판교 하면 엄청난 동네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개울에 빨래터가 있는, 친구들이 작은 산을 넘어 학교를 다니던 약간은 내 나이대와 맞지 않는 더 옛날 같은 시골이었다. 그리고 나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곤충, 물고기, 벌레들을 모두 섭렵하며 지냈다. 시골살이에 아주 진심인 어린이였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이후 중 고등학교는 분당에서 다녔고, 20대에는 강남이며 홍대, 명동에서 지치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면서 즐기며 살았다. 남편도 군대를 제대하고 도시로 나와 일을 했다. 둘 다 어린 시절은 잊고 그럴듯하게 도시애들 인척 하면서 만났다. 결혼을 한 후 도시에서 생활을 좀 더 지속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시골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시골로 내려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촌에서 살던 애들이 다시 촌으로 돌아와서 일까.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들이 꿈틀거렸다. 귀농을 빙자한 백수의 삶이 시작되었다.
봄에 왔으니 따 먹을 것들이 천지에 있었다. 냉이며 쑥, 머위, 두릅도 나오기 시작했고, 어머님을 따라가서 돌미나리를 한 바구니나 캐기도 했다. 아는 나물이 많지 않아서 캘 수 있는데 몇 개 없었는데도 많았다. 사실 다 먹지도 못했는데 따러 다니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둘 다 채집에 진심이었다. 옷을 챙겨 입고 장갑을 끼고 긴 집게를 챙겨 들고 단단히 무장을 하고 사과밭 뒷 산에 두릅을 본격적으로 따겠다고 나섰다가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모양새가 으스스해서 서둘러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재미있었다.
그다음은 근처에 있는 것들을 잡으러 다녔다. 시간이 나면 개울가로 가서 물고기, 다슬기, 징거미 같은 것들을 잡았다. 그렇지만 신기하게 낚시는 또 둘 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 였다. 우선 둘 다 지렁이를 만지지도 미끼를 끼우지도 못하고, 물고기 입에 있는 바늘도 뺄 수 없었다. 우린 그냥 어릴 때처럼 손으로, 잠자리채로, 혹은 어망을 두고 이것저것 잡고 다녔다. 잡은 것들은 먹기도 하고, 다시 놔주기도 하고,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이 놀러 오면 애들이랑 같이 키우고 보라고 잘 담아서 도시로 올려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지치면 마당에 의자를 두고 호두나무 아래 한량같이 앉아있었다. 고양이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러다 잠이 오면 한숨 자기도 했다. 얼마 있지도 않은 돈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 한편에 불안함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생각도 잠시, 날이 좋으면 둘 다 어디로 나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렇게 시골살이 일 년 차를 보내고 났더니 조금씩 자리를 잡아 나도 책방을 열고, 농사를 준비하고, 남편도 조금씩 일을 나가 돈을 벌어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귀농을 빙자한 백수생활은 유지했다. 요령이 생겨서 조금 바빠도 그 사이사이마다 시기를 잘 맞춰서 다녔다. 놀 때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동안 신나게 놀았던 덕분에 우리만 아는 장소도 많이 찾아 두었다. 그래서 꽃이 필 때 그 장소에 가서 구경을 하고, 산딸기가 나오는 시기에 맞춰서 우리가 찾아 놓은 산딸기 덤불이 있는 곳에 가서 산딸기를 따왔다. 틈틈이 물고기도, 다슬기도 잡으러 다녔다. 그리고 여전히 먹기도, 나누기도, 다시 놔주기도 한다.
시골애들의 시골 적응은 이제 좀 된 것 같다.
산딸기를 따서 먹고, 가지 하나는 꽃병에 두고 오며 가며 본다.
무언가를 잡을 때 제일 좋은 건 손, 그다음은 잠자리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