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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리 Apr 27. 2022

시골의 발견

잡초라 불리는 그 식물에 대하여

 잡초, 도시에선 그저 돌 틈, 혹은 깨어진 콘크리트 사이로 조금씩 비어져 나오며 생명력을 내보이던 식물들이었다. 그런데 시골에 와서야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경에 도착한 건 사월 초, 이제 막 봄이 시작되던 찰나였다. 집을 보러 왔을 때 마당에 있던 사람 키만 한 어떤 풀은 우리가 이사 오기 전 집주인이 잘라서 대충 정리한 상태였고, 마당엔 갈색으로 말라붙은 풀들의 잔해 정도가 남아있었다. 이제 막 마당에 움을 트던 냉이나, 아주 작은 꽃마리 같은 풀꽃 들은 귀엽기만 했다. 대충 고랑을 만들어 상추나, 오이, 호박 같은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것들을 심어두었고, 고랑에 비닐을 꼭 씌워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조금 귀찮다는 이유로 흘려 들었다. 오월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마당 여기저기에 초록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풀들은 여름이 시작하려고 하자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마당 여기저기 집 앞뒤로 무섭게 색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종류도 다양했다. 강아지 풀부터, 민들레, 이름 모를 꽃과 풀들까지 여러 종류의 풀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즐거운 마음으로 뽑아냈다. 이주일 정도에 한번, 혹은 그 사이 틈이 날 때마다 손으로 뽑아냈다. 그래도 그때에는 크기가 작고, 아직 뿌리가 깊게 자리잡지 않아서 손쉽게 뽑을 수 있었고, 그 정도는 할만했다.


 마당이 모두 풀 무더기였다. 귀농교육을 들을 때 젊은애들 집이 제일 엉망이라고 했는데 그게 우리 집이 되었다. 아주 부지런하게 관리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나 시 부모님들도 모두 풀약(제초제)을 치라고 하셨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은 같이 살아보고 싶었다. 집 앞을 지나다니는 마을 어른들의 눈빛에서 궁금함과 한심함이 묻어나는 것 같은 느낌은 게으른 젊은이의 자격지심 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름이 시작하고, 풀이 자라는 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빈집이었던 터라 몇 년을 방치해 두었던 땅에 밑거름도 안한채 작물들을 심어서 고추나, 오이, 가지들은 비실비실했다. 동네에 있는 다른 집들에 비하면 우리 집 채소들은 영 자라는 게 시원찮았다. 그런데 잡초 들은 달랐다. 땅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영양분까지 악착같이 끌어내서 살아내는 건지, 아님 햇빛이나 물 같은 아주 적은 영양분으로 살아낼 수 있는 건지 어떤 이유이든 간에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비라도 한번 오면 하루 만에 눈에 보일 만큼 키가 자라 있었다. 이제 뿌리도 꽤 커진 탓에 손으로 뽑아낼 때에도 힘을 좀 주어서 당겨야 했고, 그럼 뿌리에 흙이 가득 엉켜 있어 바닥에 툭툭- 뿌리를 쳐내서 흙을 털어내야 했다. 한쪽에 뽑아 놓은 풀들을 쌓아두면 그걸 양분 삼아 새로운 풀들이 또 자라났다.


  땅 속에 있던 씨앗들은 각자 속도가 다르게 자라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한 종류의 잡초를 뽑아내면, 또 새로운 모양의 잡초가 빼곡하게 자라났다. 새로 자라나는 잡초의 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나 많은 씨앗이 땅 속에 모여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종류가 없어지면, 다른 종류의 풀들이 자라나며, 따로 또 같이 살아내고 있었다.


 이제 그 정도 즈음되니, 풀은 더 이상 못 뽑아낼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때부터는 풀이 잔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 뽑지 못한 거라면 그냥 초록색이니까 잔디처럼 생각하기로 하고, 너무 길게 자라지만 않게 낫으로 쳐내었다. 마치 잔디 깎기로 잔디를 자르는 것 마냥 인간 잡초 깎기가 되어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낫으로 풀을 쳐냈다. 그러고 나서 갈퀴로 긁어 한 군데에 모으면 풀 더미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잘라내도 이주일이 채 되기 전에 풀이 또 자라나 있었다.


 그중에 제일 무서운 풀은 돼지감자였는데, 처음에 집을 보러 왔을 때 마당에 있던 사람만 한 풀이 돼지감자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전에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심어두셨을 터인데 캐내지 않은 돼지감자는 땅속에서 열매가 되었다 씨았이 되었다를 반복하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싹이 튼 돼지감자는 정말 하루에 한 뼘씩 자라는 것 같았고, 두세 번 잘라내면 죽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잘라도 그대로였다. 며칠만 지나면 키가 무릎만큼 자라 있었다. 그래서 ‘불로장생 풀’이라는 별명도 지어줬다.


 이제 빈집이 아닌데 빈집 같은 꼴이 되어있었다.  채소를 심은 고랑 사이에도 풀이 가득 자라면서 작물과 채소가 구분되지 않았고 나중엔 고랑 안쪽에 있는 토마토와 고추는 따러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뱀이라도 나올 것 만 같았고, 또 돌담 안에는 구렁이가 산다는 말이 생각나 초여름 이후에는 모두 방치해두었다. 애초에 ‘잡초’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심어놓았던 채소들도 내가 돌보지 않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자 그것들도 모두 잡초일 뿐이었다. 그 잡초들을 서로 뒤엉켜 자라면서 많은 벌레들을 마당으로 불러들이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끝을 모르고 무섭게 자라던 풀들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진하던 초록색이 조금씩 색이 바래고, 이제 더 이상 새로 싹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들은 본인의 일을 해내고 나면 알아서 누그러드는 것이었는데, 내가 너무 애를 썼다.  찬바람이 불자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두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신기하기도 허무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잡초에게 쏟은 내 마음 때문에 왠지 모를 서운한 생각까지 들었다.


 겨울이 되자, 누렇게 줄기만 남은 조금의 풀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여름엔 잡초에 덮여 보이지 않던 땅이 겨우내 보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하던지,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계속 황량한 땅을 보고 있으니까 초록색이 또 그리웠다. 그렇게 아주 조용한 겨울을 보냈고, 이제 다시 또 마당에 익숙한 것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에 열 번도 넘게 잘라서 당연히 죽은 줄 알았던 돼지감자 몇 개가 살아남아 또 자라나고 있다. 신기하게도 꽃씨가 날아들었는지 작년엔 보이지 않았던 들꽃이 좀 보이고, 작년에 심었던 깻잎에서 떨어진 깨에서 싹이 터서 빼곡하게 깻잎이 자라고 있는 부분도 있고, 작년과 비슷하면서 또 다르게 생명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래도 작년에 한번 해 봤으니까, 이번엔 채소 고랑에 비닐을 단단히 씌웠고, 미리 흙을 뒤엎었고, 아직은 작고 여린 풀들은 손으로 뽑아내고 있다. 같이, 또 너무 애쓰지 않도록 서로 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으로 올여름도 한번 지나 봐야겠다.


* 귀엽게 자라기 시작하는 풀들
* 낫으로 잘라 갈퀴로 모아둔다.


* 찬바람이 불자 거짓말 처럼 풀이 사라졌다.
* 올해는 냉이가 가득 자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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