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폐결핵으로 국립 마산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때 너무 많은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한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나는 '곧 읽어야지' 하던 책들을 병원 내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였다.
<나>라고 소개된 어린 소년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알려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책은 미스 풍켈 선생의 코딱지 때문에 자살하려던 소년의 눈에 비친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머 씨는 장 자크 상페가 그린 원색 삽화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이상한 지팡이를 쥔 채 하루 종일 뭔가에 쫓기듯, 줄기차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걸어 다닌다. 눈이 오거나, 폭풍이 휘몰아치거나, 햇볕이 너무 뜨겁거나, 태풍이 휘몰아치더라도 말이다. 또한 누구를 방문하는 적도 없고, 어디로 가서 잠시라도 머무는 일도 없다.
나는 좀처럼 수긍하기 힘든 기이하고, 괴상한 좀머 씨를 관찰한다. 그 관찰은 점점 마음이 약해져 어느덧 호기심에서 안쓰러움으로 바뀌고, 좀머 씨가 호수에서 영영 사라지는 순간에는 마음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좀머 씨의 병명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 이름 붙여진 전쟁 신경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좀머 씨의<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의 절실한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는 베트남 참전용사이고, 국가유공자이다. 나는 전쟁을 잘 모른다. 엄마는 늘 '아빠가 전쟁 때문에 신경증이 생긴 것 같다' 고 하셨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랐다. 나는 '아빠도 좀머 씨처럼 쫓기듯, 줄기차게 걸어 다니는, 기이하고 괴상하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아빠를 이해하는 일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늦은 밤이 되면, 고주망태가 된 아빠를 태워오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시골 동네 가게를 찾아가셨다. "막내딸도 같이 왔으니 이제 그만 갑시다" 하고 말했다. 엄마는 많은 실랑이 끝에 아빠를 리어카에 태웠다. 엄마는 리어카를 끌었고, 나는 뒤에서 밀었다. 엄마는 그곳에 언니들보다 어린 내가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 나를 데려갔다. 나 또한 엄마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 선뜻 따라나섰다. 아빠는 잘 생긴 편이었으나 술이 되어 리어카에 구부린 채 잠든 모습은 몹시도 깔끔하지 못했다.
"엄마 힘들지 않게, 내가 나중에 꼭 성공해서 리어카 말고, 자동차로 아빠 옮겨 줄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 전 사주 궁합을 봤을 때 "결혼하면 소리가 많이 납니다" 했다고 한다. 당시 엄마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소리가 싸움을 말했던 거구나' 하셨다.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이 전쟁 때문인지, 사주 때문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아빠가 우리를 간절히 제발 좀 그냥 놔두었으면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 믿는 나의 자살 시도는 어느 밤,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빠는 화가 나 있었고 폭력도 있었다. 두 언니들은 옆에서 말리고 있었다. 나는 집 바깥 유리창 미닫이문을 바로 앞에 둔 채 비가 쏟아지는 시골집 마당에 서 있었다. 던져진 물건 때문인지 갑자기 유리창이 '쨍' 하며 깨져버렸다. 유리 파편들이 내 얼굴을 스친 듯했다. 그날은 다행히 곧 싸움이 정리되었고, 누군가 유리를 쓸어 담았다. 그때 누구 하나, 나를 신경 써줄 여력이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나는 캄캄해진 밤. 비가 쏟아지는 마당 한가운데 그냥 누워 버렸다. 얼굴이 상처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것 같았다. 찹찹해진 땅속이 나를 한껏 물고 있다가 어둠과 함께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잠이 들면 다음날 내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아빠가 좀 괜찮아질까? 남은 엄마, 언니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나는 한참을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땅바닥에 누워 온몸으로 맞았다. 시간이 꽤 지났어도, 누구 한명 나를 일어나라고 챙겨주지 않았다. 나는 한참 뒤 스스로 일어났다. 그것을 '삶에 대한 의지'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해서 오그라들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 하는 비장함까지는 아니고,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없어지니깐 일어나야겠다 생각한 것 뿐이었다. 거기서 정말로 잠이 들어 아침에 발견되었다면, 정말 그때 내가 죽었을까. 지금도 한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니 의미를 두자면, 그건 분명 나 자신을 지켜낸 일은 맞는것 같다. 몸뿐만 아니라 바닥난 정신도. 다음날 아침. 거울 속 내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다. 유리 파편이 날아가면서 얼굴을 스친 느낌이 분명했는데, 아니었다. 다행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좀머 씨 같지 않은 것은, 상처든 아픔이든 적당히 <대처> 하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아빠의 대처가 술과 폭력이었던 것은 참 비극이다. 아빠를 지금도 이해하진 못하지만, 이젠 아빠도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예전에보다는 훨씬 좋아지셨으니, 옛날 일은 그냥 다 잊어 버리고, 이제 좀 제발 두 분이서 서로 의지하면서 잘 지내셨으면 했다. 또한 그렇게 지내는 듯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엄마는 담도암진단을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딸들은 아빠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도 아빠의 눈치를 본다. 아빠가 화가 나면 몹시 불편하니깐. 나는 '이게 과연 정상적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