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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꿀 Jul 05. 2021

큰언니

나는 큰언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큰언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싶다. 언니는 대학병원 간호사였다. 첫 조카로 딸이 태어났고, 2살 터울로 아들이 태어났다. 엄마는 언니의 첫 출산휴가가 끝나갈 무렵부터 두 남매가 초등학교 3~4학년이 될때까지 아이를 봐주셨다. 엄마는 언니의 데이 · 이브닝 · 나이트 3교대 근무 일정에 모두 맞추어 주셨다. 육아를 하면서 쉬는 날에는 농사일도 하셨다. 언니는 그 당시 한 달에 70만원을 엄마에게 주었다. 언니와 형부는 일주에 한 번은 꼭 엄마 아빠를 모시고 근처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아빠는 엄마가 아이를 봐주시는 대가였지만, 어쨌든 언니에게 돈을 받는다는 이유로 매번 식사값을 지불했다. 매달 첫째 주쯤에 엄마는 언니에게 월급을 받기로 약속되었다. 그러나 언니는 매번 그 날짜를 넘겨 돈을 주었다. 계좌로 주지 않고 현금을 직접 주는 방식이었다.


아빠 - 월급 받았나?

엄마 - 아직 못 받았다.

아빠 - 내일부터 얘 봐주러 가지 마!


아빠는 분풀이를 엄마에게 했다. 엄마는 언니에게 먼저 돈 이야기를 잘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아빠 성격 알면서" 엄마는 내게 하소연을 했다. "내가 언니한테 말할까?" "됐다. 내일 주겠지" 엄마는 기다리다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매주 나가는 외식 밥값. 내 계산법에 의하면 엄마가 실질적으로 받은 돈은 한 달에 50만 원 남짓. 아빠가 계산한다는 걸 알고는 점점 비싼 음식점으로 간다는 엄마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큰언니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울컥해진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대략. '엄마가 우리 얘들 키워 주실 때 용돈 많이 챙겨 드렸다. 그때 엄마랑 육아 방법이 틀려서 많이 힘들었다.' 큰언니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나는 정확하게 짚어주고 싶었다. 옆에서 지켜보았던 나는 큰언니가 말한 '육아 방법이 틀렸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언니는 유독 깔끔했고, 엄마는 평범하셨다. 하지만 엄마가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온전히 내 뜻대로 키우고 싶다면, 본인이 키워야 하는 것 아닌가. 마음에 들지 않을때 친정엄마라고, 참지 않고 할 이야기 다 하지 않았냐고! 2살 터울 남매를 신생아때 부터 초등까지! 데이 · 이브닝 · 나이트 3교대 근무 일정에 모두 맞추어 주셨고, 엄마에게 주말이 있었냐고! 남한테 그렇게 아이를 맡겼다면 70만원에 봐 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엄마 도움 제일 많이 받았으면서, 엄마 때문에 마음 편히 직장 다녀놓고! 그리고 지금은 겨우 엄마의 첫 기일이라고! 근데 나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6살 차이 나는 큰언니는 어릴때 부터 나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나는 담도암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첫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싶었다. 추모공원 제례실에서 간단히 음식을 차리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이후 추모공원 정자에 앉아 오랜만에 모인 아빠와 언니들 그리고 조카들까지, 다 같이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 먹고, 엄마를 기억하며, 담소를 나누다 헤어지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무교이지만, 언니들은 모두 교회를 다닌다. 결혼 후 교회를 다닌 둘째 언니는 제례실에서 절할 사람은 절하고, 기도하고 찬송 부를 사람은 부르고, 각자의 방식대로 추모하는 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큰언니는 그 방식을 원치 않았다. 대표로 큰언니가 기도문을 낭송하고 같이 찬송가를 부르기를 바랐다. 맞다. 종교가 없었던 엄마도 마지막에는 교회를 나가셨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본인의 제사가 딸들에게 짐이 될까 봐.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필요 이상의 걱정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던 큰며느리로써 한평생 시댁 제사를 홀로 준비했던 엄마를 생각하면, 한 번은 꼭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빠도 그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었다.


그래, 그때부터 내가 오바였는데, 멈추질 않고 계속 오바를 부렸나보다. 큰언니의 종교 그래 안다. 어릴 때 부터 큰언니가 예배와 모임으로 주말 내도록 교회에 가고 나면, 둘째언니와 나는 엄마 아빠의 농사일을 도았다. 둘째언니는 엄마를 조금 더 도와줄거라고 종종거리다 손에 동상을 입어 지금도 손이 두껍고 구부러져있다. 하지만 그게 큰언니의 잘못은 아니니깐. 또한 어차피 나는 무교이지만, 큰언니는 종교가 있으니깐. 큰언니에게 종교는 무척 중요한 일이니깐. 그래서 그것으로 큰언니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한번씩은 속이 상했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인가. 쌓아두기만한 큰언니에 대한 나의 오래된 속상함이다.


그래 그래서 큰언니의 종교를 배려해서 제사와는 직접 연관 없는, 거기서 나눠먹을 음식이라도 챙겨 오자고. 제례를 한 번은 지내고 싶다고 말한 내가 못마땅한 것인가? 우리는 큰언니의 종교를 배려하는데, 왜 큰언니는 종교없는 사람들을 배려해주지 않냐고! 첫기일이지않냐고, 처음 한번은 제사를 지내주고 싶다고! 나는 버럭했고, 큰언니는 나때문에 첫기일에 울면서 왔다. 그 말이 그렇게 억울한 말이란 말이가. 첫 기일에 맞춰 모인 추모공원에서 큰언니와 큰형부, 큰조카들에게 나는 껄끄러운 눈빛을 받았다. 내 뜻대로 간단히 제례를 올렸고, 언니는 언니대로 기도문을 낭송하고 찬송가도 불렀다. 하지만 준비해온 음식들을 추모공원 정자에 앉아 다같이 나눠먹지는 못했다. 제례가 끝나고 외부로 나가 음식점을 찾아가 다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빠는 둘째언니가 오랜만에 내려왔다고 음식값을 미리 계산하셨다.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이것도 내 욕심이구나. 다음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첫 기일이라 다같이 함께 하고 싶었다. 귀신이 어디있냐. 제사가 무슨 소용이냐. 미신이다 해도. 혹시라도 엄마가 찾아왔다가 굶고 가실까봐, 행여나 속상하실까봐. 나는 애가 탄다. 다음번에는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간단히 준비해서 조촐히 우리 세 식구, 남편과 아이와 함께 엄마를 찾아갈 것이다.


아빠에게 화내지 않는 것처럼, 큰언니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하지 못한다. 말을 하면 '큰 사단'이 그냥 너무도 예견이 되니깐. 아주 사소한 일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 작고 많은 기억들에는 큰언니의 이기적임이 묻어있다. 사람은 아주 사소한것에도 마음이 상한다. 묻어두고 그냥 이렇게 지내면 괜찮은 순간이 오는 걸까? 큰언니는 다른 입장일 수도 있다. 이건 철처히 나의 시선에만 맞춰진, 큰언니에 대한 나의 불만 토로이니깐. 양쪽 말을 다 들어보지 않으면, 중립이 제일 현명한 일이다. 드라마에서는 가정 환경이 힘들수록 자매의 우애가 유별나게 돈독한 것처럼 그려지던데, 우리는 분명 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우리 모두 괜찮지 않게 성장했기 때문일까. 그래 분명 우리 모두 힘들었다. 우리는 모두 상처투성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큰언니에 대한 불만이 조금 줄어든다. 피해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내가 살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엄마라는 끈'이 사라지니, 가끔 연락하고 가끔 얼굴을 본다. 시간이 필요한 우리에겐 나쁘지 않은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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