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초등 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집에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늘 새벽부터 농사일을 시작해야 했고, 6살 4살 차이의 두 언니들은 이미 학교를 가고 없었다. 일어나 씻고 가방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갔다. 지각을 많이 했다. 나는 '내일 비 온다. 우산 챙겨'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두 언니들이 괜찮은 우산을 챙겨가고, 살이 부러진 우산만이 남아 있었다. 엄마와 언니들은 나의 학교생활이나 숙제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도 없었다.
나는 거의 방치 수준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릴 때 내가 영특했다면 알람을 맞춰 늦지 않게 딱 일어나고, 꼼꼼히 준비물을 챙기고, 지각을 하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전쟁 같은 어제의 밤을 보냈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무기력해졌다. 학교 선생님은 매일 지각만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아침에 눈 뜨면 '아. 학교 가기 싫다' 그런 생각을 했다. 대신 나는 집에서 아주 많은 책을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먼 친척뻘의 누군가가 책 판매를 하셨고, 그래서 집에는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는 노벨문학상 전집이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할일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그냥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읽었다.
엄마가 아침에 나를 깨워주지 못하고, 준비물을 챙겨주지 못하고, 우산을 챙겨주지 못하고, 숙제를 챙겨봐 주지 못한 그런 일들은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엄마의 삶은 너무 피폐했으니깐.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이 거의 매일 있었고, 그럼에도 엄마는 새벽부터 농사일을 해야 했다. 딸 셋의 빨랫감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고, 농사일로 흙이 한가득 묻은 옷들은 바로 세탁기에 넣을 수도 없었다. 두꺼운 겨울 이불들은 중형 세탁기에 넣기도 힘들었다. 또한 옛날식 부엌은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하기에 몹시 불편한 곳이었다. 세상 편한 건조기나 식기세척기. 나는 이런 호사를 누리는데 그때의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엄마! 달걀찜 해줘"
엄마의 달걀찜은 너무 맛있었다. 고깃집에서 나오는 뽀글뽀글 한 달걀찜보다 더 맛있었다. 늦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엄마에게 늘 달걀찜을 해달라고 했다. 엄마는 내 요청에 달걀찜을 후딱 만들어 주셨다. 두 언니들이 결혼을 하고 엄마와 내가 모텔을 전전하며 힘든 날들을 보낸 이후에 아빠는 조금씩 점점 괜찮아졌다. 아빠는 안방에서 자고, 엄마는 예전 언니가 쓰던 방에서 잠을 잤다. 나는 이제 엄마의 방이 된 그 방에서 TV를 보며, 달걀찜이 있는 늦은 저녁을 먹으며, 엄마와 수다를 떨었었다. 나는 그 기억이 참 좋다.
엄마는 내게 좋은 엄마였다. 챙김이 부족했는지 몰라도 나는 엄마의 달걀찜 같은 따뜻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엄마의 달걀찜 같은 따뜻함을 주리라. 엄마에게 받은 것 보다 더 많은 챙김을 내 아이에게 주리라. 깔끔히 옷을 입히고 준비물을 챙기고, 기침을 하거나 배가 아픈 증상이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 진료를 받게 하고, 약을 챙겨주고, 깨끗이 목욕시키고, 따뜻하게 안아 재워줄 것이다. 나도 내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줄 것이다.
엄마를 더 기억하자면, 엄마는 강인했다. 엄마는 목표가 있었다. 시집올 때 조금 넉넉했던 외가댁에서 늘 부지런했던 엄마에게 많지는 않지만 논과 밭을 몫으로 주셨다. 아빠는 그것을 도박으로 모두 날렸다. 우리는 시골에서 전셋집으로 꽤 오랫동안 살았다. 주인에게 돈을 내고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엄마는 돈을 모아 전세를 벗어나 내 집을 갖는 목표가 있었다. 아빠 몰래 모은 돈을 보태 엄마는 정말 시골에 작은 집을 지었다. 세세하게 학교에서 몇 등 했는지 궁금해하진 않았지만, '요즘에는 여자도 전문대라도 나와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큰언니가 간호 전문대을 갔고. 집에 빨리 보탬이 되고 싶어 대학을 안간다던 둘째 언니를 계속 설득해 2년제 전문대를 보냈다. 이후 나도 자연스럽게 대학을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아빠의 반대가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아 다행한 일이긴 하다.
엄마는 딸들을 시집을 보내고, 첫째 딸의 손주를 봐주셨다. 둘째 언니가 아프거나 일이 있을때 경기도로 올라가서 급한 일 끝날때까지 있어 주셨다. 셋째 딸이 늦게 결혼해 막내 손주가 생겼고, 그 아이까지 봐주셨다. 그것도 감사한데, 엄마는 "너희 아빠보다 딱 하루는 더 살고 가야 할 텐데" 하고 걱정했다. 아빠가 애먹이는 일이 많다 보니,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아빠를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엄마를 생각하면 그냥 엄마는 슬픔이다.
엄마! 엄마의 그 달걀찜이 너무 먹고 싶은데. 내가 하면 그 맛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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