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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확인서를 내야만, 엄마 곁에 설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간병기

by 꿈을꾸는아이

코로나 시대의 간병은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병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코로나 음성 확인서가 필요했다.

매주 금요일 밤 간병을 가기 전, 보건소나 병원에서 음성 확인서를 받아야 했다.

간병 교대를 매주 하면서도, 매일 소정의 근무시간을 채워야 했던 나에겐 이런 조건이 혹독했다.

가끔은 보건소에 수백 명이 줄을 서 있기도 했다.

그럴 땐 오전 반차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음성’ 두 글자를 받기 위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정부가 코로나 검사비용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게 된 것이다.

검사비는 7만 5천 원, 비싼 곳은 14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동생과 내가 매주 번갈아가며 간병을 했기에, 한 달이면 검사비만 50만 원이 넘었다.


병원은 질병에 취약한 공간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눈치 본다고 안 옮기겠는가.

코로나 초기의 분위기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1호 확진자, 10호 확진자가 나왔을 때, 정부와 시민의 반응은 냉정했다.

환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부는 카드 사용 내역까지 추적했고, 사람들은 마녀사냥을 했다.

“기침을 했는데 사람을 만났다고?”

“왜 하필 내가 간 곳에?”

아무리 조심해도 걸릴 수 있는 게 바이러스인데,

그 시절의 사회 분위기는 바이러스뿐 아니라 인정과 연대마저 격리시켰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엄마와 동생도 결국 확진 판정을 받았다.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치료가 중단되고, 이동도 금지됐다.

안타까우면서도 민망했던 건 병실의 다른 가족들이었다.

그중 한 명만 걸려도 병실 전체가 격리 대상이 되었다.

마치 오가작통법처럼.

병실 모두가 코로나 홍역을 앓고, 2주가 지나야 겨우 통제가 풀렸다.

동생은 나중에 말했다.

바이러스보다 더 힘든 건 사람들의 눈초리였다고.


코로나는 고통을 주는 바이러스인 동시에, 사람들을 서로 감시하게 만드는 구조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고, 서로를 피했다.

사회는 파놉티콘이 되었다.

감시자는 없었지만, 모두가 감시자가 되었다.

그렇게 간병은 더 고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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