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묻는다. "어머니는 잘 지내세요?"
나는 대답한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 그 말이 늘 망설여진다.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게 최선일까?
사실 엄마가 잘 지내는지 아닌지는 말없는 엄마만이 알고 있다. 나는 엄마 대신 그렇게 말해줄 뿐이다. 내가 느끼는 마음과는 별개로, 엄마는 여전히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대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한 말이자,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일종의 주문이기도 하다.
물론, 엄마는 앞으로도 잘 지낼 거다. 나와 함께 잘 지내볼 예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잘 지낸다'는 정의는 매우 추상적이고,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엄마는 매 순간 싸우고 있다. 가래와, 답답함과, 우울함과. 그렇게 침대에 누운 채로도 삶의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나는 그 곁에서 함께 걷는다. 엄마는 잘 지내고 있다. 그 의미를 내가 대리자로서 정의해 본다면, 엄마는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건 그저 담담하게 마주해야 할 현실이다.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이 현실을 '이겨내야 할 병마'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앞으로의 청사진은 그저 지옥도가 되고 만다.
우리는 병을 이겨내야 할 적으로 보기보다, 삶의 일부로 껴안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
삶은 어느 정도,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 의미는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좋은 대학을 가고, 자식농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때로는, 불편한 몸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인생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삶이 끝나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삶이 불쌍한 삶인가?
나는 묻고 싶다.
삶의 평가자는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일까?
만약 많은 이들에게 내 삶을 ‘살 만한 삶이었다’고 인정한다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사지마비의 몸을 지녔지만, 정신만은 올곧으려 애쓰고, 슬픔을 끌어안고 이겨내며 정신의 승리를 향해 걸어간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적어도 그의 '의로움과 진실함 그리고 멋짐'을 알아주는 절대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남 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옳음을 증명할 기준조차 없다면, 나는 어떻게 나의 '멋짐'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신의 존재가 필요함을 언급한다.
삶에는 정해진 절대 목표가 없다.
신은 우리에게 '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기본적인 방향 외에는 많은 자유를 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삶의 목표를 설정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엄마가 일어서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은 다르다. 그저 엄마의 몸무게가 더는 빠지지 않고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목표는 바뀔 수 있고, 바뀌어도 괜찮다. 그 유연함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뇌병변은 분명 큰 한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재발견해야 한다.
목표의 재구성 없이는 좌절만이 기다릴 것이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을 적당히 즐기며 살아가야 한다.
인간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저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한 즐거움의 매개체 정도로 보면 충분하다.
물론, 일부의 좋은 관계는 예외다. 그런 관계들은 유지하고, 서로 돕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가족은 위대하다.
물론 모든 가족이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그 위대함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압이 낮아지고, 혈류가 줄어들더라도, 결국 피는 돌고 돌아 가족이라는 논리적 육체를 따스하게 데운다.
병, 질환.
절대적 기준에서는 분명히 질병이다. 하지만 그 병이 내게 왔다면, 그것은 이제 '새로운 나'다.
그저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일부다.
삶은 정해진 형태가 아니다. 삶은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매 순간의 연속이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글 쓰는 게 쉽지 않아 졌습니다. 그래서 연재를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제가 글을 쓴 이유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귀한 시간을 내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