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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Apr 30. 2020

시집간 손녀딸의 고백

 내 사랑 외할머니 집에는 은밀한 아지트 같은 공간이 있다. 거실과 문 하나로 철저하게 분리된 네모난 곳. 우리가 긴밀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거실까지 들리지 않는 공간. 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거실에 앉아 있는 가족들이 절대 들을 수 없는 그곳. 엄마도 나도 할머니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을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할머니 집 부엌이다.


 결혼하고 두 번째 맞이하는 설날, 나는 우리의 아지트에서 부엌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을 하고 할머니에게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고백을 했다. “할머니, 나는 신랑이랑 싸우면 제일 생각나는 사람이 할머니야. 엄마도 아니고 할머니가 그렇게 보고 싶어. 그리고 할머니한테 너무 오고 싶어. 내가 올 곳이 여기밖에 없어.”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하던 손녀딸이 뜬금없는 고백을 하니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에서야 할머니의 마음이 궁금하지, 그때 당시에는 할머니의 마음보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에 더 애달았었다.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귀자.’ 같은 설렘 가득 달콤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달콤한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할머니가 해줬으면 좋겠고, 그 말을 빨리해줬으면 했다. 혹시라도 ‘미안해, 나에게 조금 시간을 줘.’라는 심장이 툭 떨어질 것 같은 대답을 들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모든 단어와 나의 음성이 달콤하지 못했기에 할머니에게서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더 긴장됐다.


 손녀의 고백을 들은 할머니는 가스레인지 불을 조절하다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 표정은 도통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내 고백에 할머니의 마음이 복잡해진 걸까. 대답만 애타게 기다리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나에게 할머니가 말했다.


“그래. 여기로 와.”

 

 할머니의 대답에 잠시 멈추었던 모든 혈액이 다시 활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항상 그랬다. 한 번도 내 말에 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된다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늘 내가 듣고 싶은 대답만 해줬다. 내가 조금 빨리 가더라도 때로는 조금 늦더라도 할머니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날 기다렸다가 내 마음을 보살펴줬다.

어떤 이유든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날 보듬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숨쉬고 있다는 , 내 존재가 특별해지는 나날의 연속이다. 


 결혼을 하고 간절했던 바람은 더 짙어졌다. 할머니와 내가 우리의 은밀한 아지트에서 오랫동안 많은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내가 할머니라고 부르면 대답해 줄 그녀가 계속 나와 같은 땅을 밟으며 지냈으면 좋겠다. 시집간 손녀딸은 이렇게 자꾸 할머니의 시간을 꽉 붙잡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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