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봉희 May 16. 2020

우리의 여름 이야기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아 땀범벅이 돼도 아이스크림 하나면 충분던 2년 전 여름. 아이는 나에게 방학숙제로 반 친구들에게 손편지 쓰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은 나는 순간 한 반에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떠올랐고, 아이에게 “반 친구들 모두 다? 그걸 하루에 다 썼어?”라며 놀란 눈으로 말을 했었다. 아이는 “그건 아니고요. 10명 조금 넘게? 그리고, 하루에 한 명씩 썼어요.”라고 대답했다. 방학숙제를 개학 하루 전 날에 눈물을 머금고 하던 나와는 달리 시간을 내어 하루에 한 명씩 편지를 썼다는 아이. 나는 "친구들이 너무 좋아하겠다. 좋겠다!"라는 말을 하고는 그림 그리는 아이 모습을 오래 눈에 담았었다.


 그날 나는 아이에게 전보다 더 많이, 푹 빠져들었다. 손편지에 많은 의미를 두고 사는 나에게는 너무나 낭만적이고, 마음이 포근해지는 방학숙제였다. 그리고 손편지 쓰기 숙제를 했다고 말하는 아이의 표정에서 뿌듯함과 행복함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그 순간의 감정을 아이도 느꼈을까. 느꼈다면 아마 나보다 더 커다란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긴 문장이 아니더라도 나를 생각하며 써 내려간 문장이 가득한 손편지를 좋아한다. 손편지를 쓴다는 건 편지 받을 사람을 떠올리며 그 사람에게 어울릴 것 같은 편지지를 고르고, 볼펜으로 쓸지 연필로 쓸지 고민을 하고, 볼펜으로 쓴다면 어떤 색으로 쓰면 좋을지 또 고민하고, 책상에 편지지와 필기도구를 올려놓고 어떤 말을 전할지 모든 준비과정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마음을 쏟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시간을 내어 주는 일. 내 시간을 선물하는 일. 그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기에 손편지를 선물로 받는 건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학원에 온 아이는 나에게 수줍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손 한 뼘도 안 되는 크기의 종이. 선을 맞춰 반으로 접어 '선생님께'라고 꾹꾹 눌러쓴 종이. 나풀거리는 종이 사이로 힐끔힐끔 보이는 자음과 모음. '좋겠다'라고 말했던 나를 기억하고는 내 생각을 하며 시간을 내어 써준 손편지. 작은 내 손바닥 만한 종이 한 장 속에는 나의 행복도 빌어주고, 나의 건강도 챙겨주는 문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를 위해 어떤 노트를 자를지 고민하고, 가위로 원하는 크기로 잘라 내 생각을 하며 쓴 문장. 편지를 전해줄 날을 기다리고, 작은 가방에 편지를 넣어 학원에 오는 내내 설레었을 아이. 편지를 받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했을 아이. 종종 하루가 짧다 말하며 살았던 내게 그날만큼은 아이의 시간이 더해져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2년 전, 나에게 시간을 선물해줬던 아이는 요즘은 어디서 일을 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었던 일을 좀 더 열심히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나에게 선생님이 만든 책 나오면 사서 읽어보겠다며,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는 바삐 인사를 남기고 다음을 기약했다. 고마운 사람. 선생님이 진짜 왕왕 열심히 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게. 그리고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마워.


 

이전 10화 비도 오고 따뜻한 너도 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