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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Jan 05. 2021

아티스트 데이트

내 안의 창조성을 위하여

잠에서 깨니 오전 3시 반.

너무 이른데. 몸 상태를 살펴보니 약간 식은땀이 나려고 한다. 더 자기로 하고 눈을 감았지만 한 시간 반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5시에 기상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구르기 열 번으로 오전 습관을 마친 다음, 따뜻한 물을 찻잔에 담아와서 자리에 앉는다. 아무래도 으슬으슬한데. 망했어. 오늘 아티스트 데이트*인데. 고대하던 날인데. 하려고 맘먹은 것들이 많았는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홍삼청을 한 스푼 떠서 따순 물에 타 와서 호로록. 이러면 좀 낫겠지.


그때부터 30분간 모닝 페이지를 쓰고, 밥을 차려 먹고, 새벽 출근. 아무도 없는 대로를 활기차게 걸어가며 뿌우우우웅~! 시원하게 방귀도 뀐다. 이게 새벽 출근의 맛이지. 캬하하


출근했는데 A직원이 벌써 와 있다. 일처리가 엉망인 B직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이다(우리의 직급은 나> A> B 순서이다). 그래그래. 나도 울고 싶다. 얘를 어찌해야 할까.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고, 말하기 어려운 게 있으면 내가 대신 말해주겠다고, 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두려워하지 않으니 참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조만간 둘이 몸보신이라도 하러 가자고 마무리했다. 다행히 A는 다시 기운을 차린 듯하다.



점심. 아티스트 데이트를 할 시간.

오늘의 계획은 고투몰과 백화점이다. 먼저 고투몰에 가자. 거기가 쇼핑의 메카라며. 옷이든, 그릇이든, 꽃이든 뭔가 운명적인 조우를 할지도 몰라.


고속터미널역에서 고투몰 가는 길을 몰라 한참 헤맸다. 여기는 아무리 와도 지리가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내가 길치, 방향치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남들 앞에 나서서 걷곤 했지. 흐흐흐


겨우 찾았는데 웬걸. 태반이 문을 닫았다. 코로나의 영향이 심각한 것 같다. 문을 연 가게의 주인들은 수심이 그득한 얼굴이다. 이러면 물건을 잘 볼 수가 없다. 물건을 들여다보면 주인이 기대에 찬 얼굴로 다가올 것만 같아서, 그 기대를 배반하는 게 너무 괴롭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는 편이 낫다. 꽃상가나 가야겠다. 그런데 거기는 어디지? 고투몰 아니었나?


다시 고속터미널역으로 돌아왔더니 다리가 많이 아프다. 쇼핑이고 나발이고 집어치우고 싶다. 물건이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그래. 내가 무슨 쇼핑이야. 원래 좋아하지도 않잖아. 물건의 디테일을 보는 눈도 없는데. 내게는 이 모든 것들이 그냥 한 덩어리의 stuff로 보이는데.


아니야 잠깐만. 슬슬 너의 안목을 폄하하려는 걸로 보이는데? 이런 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제한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봐. 너는 지금 피곤한 거야. 많이 걸었어. 일단 앉아서 밥을 먹으면서 쉬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몸도 으슬하고 날씨도 꾸리한 게 백반집 가서 양곰탕이나 포장해 와 뚝배기에 자글자글 끓여먹으면 딱이겠는데. 아쉽지만 그럴 순 없지. 오늘의 아티스트 데이트를 여기서 마감할 수는 없어. 백화점 안 세탁소에 맡겨 둔 겨울 패딩도 찾아가야 하잖아. 일단 백화점으로 가자.



신세계백화점 9층 자주테이블에 앉았다. 리코타 치즈 팬케이크가 유명한데 식사 시간에는 그것 하나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가 없다. 메뉴를 살펴보니 '트러플 포르치니 탈리아텔레'가 눈에 띈다. 하몽도 들어간단다. 그래. 명색이 아티스트 데이트인데 트러플에 하몽 정도는 먹어줘야지.


음식이 나올 동안 할 일이 없다. 시간의 질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서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었다. 뭘 하지? 어제 본 '아티스트 웨이'에 관찰의 의미에 대해 나오던데, 관찰이나 해볼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둘이 들어오는 게 보인다. 인도해 줄 자식들도 없이. 능숙하게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 담소를 나눈 뒤 파스타를 먹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저들은 분명히 은퇴했을 나이에도 어디서 여유가 나서 파스타 한 접시에 근 삼만 원이나 하는 이런 레스토랑에 올 수 있는 것일까. 계모임도 결혼식도 아닌데.


별 수 없이 엄마 생각이 난다. 이런 데 오면 혼자 화장실도 못 찾아갈 것 같은 우리 엄마. 어떤 파스타가 좋은지 물어보면 빨간 거나 하얀 거로 답하는 엄마. 누가 들을새라 낮은 목소리로 "얼마야?" 하고 물어본 뒤 답을 듣자마자 미처 주위를 신경쓸 겨를도 없이 "히이익!" 소리를 낼 우리 엄마. 어쩔 수 없이 짠한 마음이 든다. 잘해드리고 싶다.


학생 때 과외 알바 때문이었던가, 나는 매주 목요일 낮에 압구정역을 지나쳤다. 백화점 통로로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놀랐던 건 그 시간대 백화점에 있던 노인들. 내가 흔히 아는, 굽은 허리로 폐지 줍는 리어카를 밀거나, 경로당 한 귀퉁이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이 아니라, 명품 옷을 곱게 차려 입고, 자수를 놓은 모직 모자같이,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아이템을 장착하고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던 노인들.


나의 젊음도 그들의 부, 그들의 취향 앞에서는 초라한 것처럼 느껴졌다. 삶에 찌들어 있던 20대의 나는 70, 80대의 그들을 질투했었지. 평일 오전에 백화점 레스토랑에 앉아 고생한 엄마를 떠올리는 건 사실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 안쓰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사실 엄마는 파스타 좋아시지도 않아.



밥을 먹고 세탁소에서 패딩을 찾은 후 백화점을 나선다. 눈앞에 고속터미널 상가 3층이 보인다. 아, 저기가 꽃시장이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안 가볼 수 없지. 무거운 패딩이 든 쇼핑백을 어깨에 걸치고 상가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저기 꽃. 고투몰보다는 활기차다. 다행이야. 한 다발 사고 싶지만 선뜻 나서게 되지 않는다. 내 돈 주고 꽃을 사 본 적이 없다. 물건을 살 때 '필요한 것인가'만 생각했지 '가지고 싶은가'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내게 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예쁘기만 할 뿐 무가치한 것이었다. 예쁘기 때문에 가치 있는 줄도 모르고.


괜찮아. 꽃시장에 발걸음을 한 것만으로도 위대한 진일보인 것이지. 다음에는 한 다발 사가자꾸나.


마지막으로 스타벅스 리저브에 들른다. 커피 원두가 다 떨어졌다. 스타벅스 원두는 써서 잘 안 먹지만 리저브는 좀 다르겠지.


사 온 커피콩을 갈면서 나만의 의식을 시작한다. 다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맛본다. 에퉤퉤! 왜 이렇게 써. 리저브도 별 거 없구나.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남편에게 커피를 드립해 주는 것으로 처분해야겠다. 입맛 까다롭지 않은 남편이 이럴 때 참 고맙구나.


아티스트 데이트를 마치고 나서 생각해 본다.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기 위해 야심차게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사전에 뭘 할지 계획을 세웠더니 그때부터는 데이트가 아니라 일이 되는구나. 오늘도 지난주부터 생각해 둔 할 일 리스트를 머릿속에 좌라락 펼치면서 하나하나 지워가기에 바빴지.


앞으로는 그냥 내 맘 가는 대로 자유롭게 하자.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저)에 나온 미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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