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Sep 15. 2024

윌리엄스버그에서 인생 니트를 만나다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미국에 온 지 2주째, 아이가 학교 간 지 5일째 되는 날.


오늘은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아울렛에 가기로 했다. 내가 미국에 들어올 때 선박 택배가 막히는 바람에 꼴랑 이민가방 한 개와 캐리어 두 개(그것도 하나는 기내용) 밖에 못 들고 들어왔다. 아이 책과 장난감까지 챙기는 바람에 옷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 내 긴팔 윗도리는 달랑 두 개 넣어 왔으니 말 다했지.


미국에서는 다들 거지꼴을 하고 다닌다기에 안심하고 왔더니만 꼭 그렇지도 않더라. 무엇보다도 주일에 한인교회에 출석했는데 다들 이 거친 미국살이에도 어쩜 그리 고운 피부와 세련된 복장을 유지하고 계신지. 진짜 거지꼴로 출석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사회초년생이 정장 두 벌로 일주일 출근복 돌려 막기 하듯이, 몇 벌 되지 않는 옷으로 번갈아 입으며 버티려니 쉽지 않다. 게다가 2월 중순에 입국하면서 곧 봄이 올 것을 기대했건만 무슨 놈의 날씨는 이제 3월인데도 한겨울이다. 멋도 멋이지만 그 이전에 얼어 죽겠다. 빨리 긴팔 옷 수혈이 시급해.


주위 분들에게 옷을 살만한 곳이 있는지 물으니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윌리엄스버그에 아울렛이 하나 있단다. 반색을 하며 "거기 괜찮은가요?" 했더니 "음... 글쎄요??" 하는 반응. 어떤 분은 '단언컨대 거기서 건질 건 하나도 없다'라고 확언하시며 차라리 애틀랜타에 있는 아울렛에 가보라고 한다. 시험 삼아 애틀랜타에 있는 지인에게 '거기 아울렛 좋냐'라고 물었더니 또 "음... 글쎄요?" 하면서 차라리 뉴욕에 있는 우드버리 아울렛을 가라고 하시고.


에혀... 애틀랜타고 뉴욕이고 우리 집에서 다 차로 6~8시간 걸리니 당장 생필품 같이 필요한 옷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환율도 안 좋은데 미국 옷가게 매장에서 정가 주고 사기도 부담스럽다. 그런고로 윌리엄스버그 아울렛에 가 보기로 했다.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적당히 채비를 한 뒤 길을 나섰다. 미국에 온 뒤 맨날 외출이라고는 DMV, SSA, 교육청 같은 곳밖에 없었는데 처음으로 정착 업무와 관련 없는 일로 나가려니 한껏 들뜬다. 긴장감 하나 없는 바깥나들이가 도대체 얼마만인지.


라떼 한 잔 사서 느긋하게 마시면서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가리라. 맘먹고 먼저 파네라부터 들렀다. 아직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카페가 맛있는 지도 모르고, '미국의 파리바게뜨'라는 파네라의 라떼도 한 번 맛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서 가장 가까운 파네라를 검색해서 찾아간 다음 얼른 들어가 주문했다.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라떼를 받아 들고 기대감에 차서 한 모금 먹었는데.... 어후, 이게 뭔 맛이여! 미국 애들은 매일 이런 라떼를 마시는 건가? 쯧쯧 안 됐네...라고 생각하다가 어쩌면 지점의 것이 특히 맛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운전석 컵홀더에 라떼컵을 장식처럼 꽂아두고 다시 출발.

(사실은 다른 날에 찍은) 파네라

꼬박 한 시간쯤 달린 뒤 아울렛에 도착했다. 주차를 한 뒤 내리니 익숙한 듯, 낯선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건물 생김새는 한국의 아울렛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한국 아울렛은 2층, 3층으로 되어있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는 전부 옆으로 드넓게 1층으로 펼쳐져 있다. 새삼 미국의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다.


먼저 폴로 매장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아이 옷은 비교적 넉넉히 가져온 줄 알았건만 막상 학교에 보내기 시작하니 입힐 게 없다;; 맨날 운동복 차림으로 보내기도 민망하니 선생님 보시기에 단정해 보이도록 옷깃이 있는 셔츠와 면바지를 사기로 했다.


진열대 위에 있는 옷들을 구경하면서 가격표를 들춰봤는데 생각보다 싸지 않다. 물론 강남 신세계 매장가 같은 것과 비교하면 싸긴 싸겠다만, 미국 아울렛에서는 폴로를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막 주워 담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적어도 이 매장에서는 아니었다.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한 벌에 5~7만 원 정도 하는 듯하다. 어쨌든 필요하니 안 살 수는 없어서 티셔츠와 바지를 한 벌씩 샀다.


그다음은 나이키 매장. 아이가 입을 만한 간절기용 긴 바지를 찾으러 들어갔는데... 아울렛이라 그런가. 기모가 들어간 아주 두꺼운 바지 아니면 아예 반바지밖에 없었다. 윗도리도 기모가 들어간 후드티 아니면 반팔 티밖에 안 보인다. 한국에서 자주 입는 얇은 긴 팔 츄리닝 세트는 아예 찾을 수도 없었다. 미국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위에는 두꺼운 후드티,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는데, 혹시 그런 옷밖에 안 팔아서 그런 거였냐! 묘하게 납득이 가네 그려.


게 중 아이에게 입힐 만한 옷을 몇 벌 고르고, 나이키 로고가 박힌 커다란 은색 텀블러도 하나 담았다. 미국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 또 하나가 사람들이 어딜 가든 다들 자기 팔뚝만 한 물통을 들고 다닌다는 거였다.


나중에 살아보니 미국은 돌아다니다가 생수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우리나라처럼 공공장소에 정수기가 설치된 곳은 하나도 없고, 편의점도 눈에 띄지 않으며, 차를 가지고 마트에 가면 몇십 묶음으로 생수밖에 수가 없다. 어쩌다 관광지에 가면 음료수 자판기에서 생수를 발견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아이가 학교에 갈 때도 물을 싸 보내야 해서 아이 취향에 맞게 스포티한 텀블러를 선택했다.


쇼핑을 얼마 안 했는데 벌써 지쳐왔다. 원래 여행 체력은 만렙인데 쇼핑 체력은 저질인 몸이다. 뭐라도 먹을까 싶어 이 드넓은 아울렛에서 식음료 매장이 있는 곳을 찾아 그쪽으로 걸어가던 중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이클 코어스.


갑자기 추억이 돋았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귀국선물을 사려고 들렀던 와이켈레 아울렛에서 마이클 코어스의 가방을 하나 득템했었지.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밝은 아이보리톤 인테리어를 한 매장 안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가방들이었다. 어슬렁어슬렁 한 바퀴 걸으며 둘러봤지만 딱히 구매욕이 드는 것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혼여행 때로부터 이미 십수 년이 흘렀고, 사이에 맘에 드는 가방들이 여럿 생겼다. 이상은 필요 없다.


그러다가 매장 구석에 걸려 있는 옷들에 눈에 갔다. 마이클 코어스 하면 가방만 떠올렸지 옷을 살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꽤나 비쌀 것 같지만 뭐 구경이나 해볼까?


이것저것 들추다가 긴팔 니트 윗도리에 시선이 멈추었다. 디자인이 특별히 예쁜 건 아닌데 만져보니 품질이 꽤 좋아 보인다. 솔직히 나는 패션문외한이라 이런 거 감별하는 능력은 제로이지만, 그런 내가 느끼기에도 니트가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쫀쫀하게 짜여 있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 궁금해서 가격표를 들춰보니 오잉? 59 달러? 159 달러가 아니고? 눈을 의심했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59 달러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낚아채갈까 봐 잽싸게 집어서 피팅 룸으로 달려갔다. 입어보니 촉감이 더욱 좋다. 세상에... 나는 니트란 가볍지만 성글거나, 무겁지만 쫀쫀하거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마이클 코어스, 일 잘하네.


아직 미국 환율에 적응을 못 해서 5달러, 10달러 쓰는 데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마음의 소리는 "어머, 이건 사야 해!"라고 강력하게 외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니트를 들고 계산대로 걸어가서 "Check out, please!" 말했다. 혹시나 해서 계산 전에 '이거 59 달러 맞냐'고 물었더니 직원이 난감해하면서 '세금 포함 62.2 달러'라고 말했다. 휴우, 놀래라.


계산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이, 신난다. 기대하지도 않은 윌리엄스버그 아울렛에서 인생 니트를 건졌네그려. 옷도 너무 마음에 들고, 이제 긴 팔 니트가 생겼으니 춥지 않게 지낼 수 있겠다.  


그다음 앤티앤스에서 프렛첼을 사서 고픈 배를 달래며 즐겁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는 길에 갑자기 햇빛이 엄청 내리쬐기 시작했다. 이 정도 햇살은 미국에 와서 처음인데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차에서 내렸더니 긴 팔 니트를 입은 것이 무색해질 만큼 더웠다. 심지어 이마에서는 살짝 땀도 난다. 버지니아 날씨 왜 이런겨...


결국 나는 일주일 뒤에 다시 반팔을 사기 위해 윌리엄스버그로 향했다.




[정착 꿀팁]

윌리엄스버그 아울렛에 있는 타미 힐피거 매장과 캘빈 클라인 매장은 한 군데에서 옷을 사면 상대방 매장의 15% 할인 쿠폰을 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