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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14. 2021

새우튀김과 떡볶이


아파트 안 놀이터 공터와 주차장에 커다란 천막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파랗고 하얀 비닐천들이 마치 놀이동산 회전목마 부스를 연상케 했다.


채소 가게, 건어물 가게, 곡물 가게들이 보였다. 과일 가게의 낮은 단상 위에서는 신선한 딸기와 검붉은 체리, 파릇한 샤인 머스캣들이 시선을 자극했다. 봄내음이 가득 느껴졌다. 마침 햇살도 알맞게 눈부시고 따스했다.  


그 끝에 있는 분식집에 눈길이 갔다. 포도맛, 오렌지맛 슬러시 통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옆에 놓인 간이탁자에서는 하교 길에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와 아이가 마주 보고 앉아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커다란 사각 양철판으로 만든 떡볶이 통 안을 언뜻 보니 가늘고 기다란 밀떡이 아니라, 굵고 쫄깃한 쌀 가래떡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되직한 양념으로 볶아낸 것이었다. 마음에 드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국물떡볶이는 내 스타일이 영 아니었다. 이런 떡볶이가 찐이지.


분식집이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옆에 코너를 돌아가니 튀김가게가 있었다. 흔히 아이스크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냉장고 안에는 갖가지 튀김들이 굵은 빵가루 옷을 입고 얌전히 누워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더라니. 이게 있어야 역시 아파트 장날이지.


눈을 들어 튀김가게 앞에 걸린 노란 현수막을 보았다. 등심 돈가스, 치킨가스, 생선가스, 왕새우튀김 등을 A 세트부터 G 세트까지 다양한 조합으로 팔고 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등심과 치킨을 섞은 A 세트로 할까, 아니면 치즈돈가스가 들은 E 세트로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늘은 새우튀김으로 해야지.



새우튀김은 내게 특별한 음식이었다. 웬만한 요리사들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요리 솜씨가 뛰어난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갖가지 음식을 손수 만들어주셨다.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식당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보다 많았다.


엄마가 집에서 통 오징어의 속을 깨끗이 씻어내고 그 안에 자른 당면과 다진 고기, 채소들을 만두소처럼 꽉꽉 채워 찜기로 찌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징어순대라는 음식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그것을 집에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엄마가 어쩐 일인지 새우튀김을 해 준 기억은 없었다. 기름에 튀기는 음식 만들기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돈가스는 늘 쟁여 놓고 먹었고, 고구마튀김은 일요일 아침의 단골 메뉴였다. 두꺼운 대접시 위에 산더미처럼 쌓은, 갓 튀긴 고구마튀김을 먹으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보는 것이 나의 일요일 아침 주된 일과였다.


나중에 커서야 알았다. 엄마는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았고, 집에서 오징어순대같이 해산물을 사용하는 요리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빠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것을. 어린 나는 새우튀김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엄마에게 해 달라고 말할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아니 먹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급식시간에 나오는, 튀김가루를 물에 개어 만든 반죽에 알이 작은 새우를 퐁당 떨어뜨려 건진 다음 튀겨낸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스스로 번 돈으로 원하는 식당을 갈 수 있게 되고 나서야 굵은 빵가루를 입힌, 손가락 두 마디를 합친 것보다 긴 새우튀김을 처음 먹었다. 으아, 이렇게 맛있을 수가!


갓 튀겨낸 새우튀김을 한 입 베어 물면 빵가루에서 바사삭 소리가 나는 것이 귀까지 생생히 전달되었다. 뜨거운 새우살과 타르타르소스의 조합은 또 어떻고. 튀김에 마요네즈 베이스의 소스를 찍어 먹을 때에는 고소함이 두 배!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즐거움이었다. 이런 걸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고 하던가.


게다가 원하는 음식을 가격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어른의 맛까지 더해졌다. 나는 그 자유를 맘껏 누렸다.


하지만 나의 새우튀김 사랑은 출산과 동시에 끝이 났다. 입 짧은 아이가 먹는 것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남기기 일쑤라 나는 식사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반찬은커녕 아이의 잔반을 처리하기에도 바빴다. '내가 뭘 먹고 싶은가'보다 '아이가 뭘 먹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온 몇 년이었다.


오늘은 마침 아이 학원 스케줄이 빡빡한 날이었다. 지금부터 세 시간은 자유부인이야. 이참에 나만의 만찬을 즐겨야겠다.


먼저 튀김가게에 가서 "G 세트 주세요."라고 했다. 등심 돈가스 석 장에 새우튀김 네 마리. 이거면 내 만찬도 즐기고 아이 저녁도 해결이다. 간만에 들고 나온 지갑을 꺼내 현금으로 만 이천 원을 계산했다. 지폐를 내밀자 주인 아주머니가 반가운 웃음을 건넸다.


그 사이 옆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 일 인분을 포장했다. 튀김만 먹으면 매운 게 당기겠지. 매콤한 양념맛을 생각하니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아주머니가 비닐봉지에 담아 준 떡볶이를 에코백에 넣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런 날 맥주가 빠질 수 없지. 한 캔만 사려고 했는데 클라우드 생 드리프트 네 캔을 만 원에 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남은 건 다음 주 장날에 또 마셔야지. 히힛


에코백에 떡볶이와 맥주를 같이 넣으니 더운 김과 찬 김이 제각각 식을세라 걱정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튀김가게 앞에서 남은 시간을 기다렸다가 잽싸게 받아 들고는 집까지 한 달음에 날아갔다.  


얼른 포장을 풀고 떡볶이를 대접시에 옮겨 담았다. 아무리 급해도 미식의 미(美)를 포기할 순 없어. 튀김은 그대로 놓는 게 더 먹음직스럽게 보일 것 같아 그냥 두었다.


새우튀김을 손으로 집어 레몬색 타르타르소스를 푸욱 찍었다. 그리고 입 안에 넣고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으음...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살짝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갈색으로 튀겨진 빵가루와 알찬 새우살의 고소함이 입 안에 가득 퍼진다.


씹으면서 딸깍! 맥주캔을 따고 한 모금. 캬아~ 이 맛이야. 쌉싸름한 맥주가 튀김과 어우러지며 느끼함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떡볶이 하나를 포크로 찍어 입에 날랐다. 어금니 사이에서 말랑말랑 쫄깃쫄깃 씹히는 매콤한 맛. 환상의 조합이네. 다 씹은 다음 맥주 한 모금과 함께 목 뒤로 넘겼다.


그래, 다음 주도 장터행이다.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다시 새우튀김을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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