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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15. 2021

휴게소 호두과자


한 시간 남짓 앞만 보고 달리던 중 파란 간판에 숟가락과 포크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행담도 휴게소. 저기서 좀 쉬어갈까?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자 차가 휴게소 쪽 도로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휴게소 바로 앞 주차자리는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어 멀찍이 뒤쪽에 차를 대었다.


운전석에서 내리자 온 몸이 뻐근했다. 미쳐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긴장했었나 보다. 하긴... 면허를 딴지 오래되었지만 늘 동네에서만 왔다 갔다 하다가 처음으로 혼자 장거리 운전에 도전한 날이었다.


휴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기지개를 쭉 편 뒤 허리 뒤를 양 손으로 받치고 뒤로 젖혀 넘기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뭉쳐있던 근육들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끼며 화장실로 향했다.


볼 일을 마치고 나오니 쌀쌀한 겨울바람을 타고 온갖 음식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뭘 먹어 볼까. 슬슬 가게 쪽으로 발걸음을 했다.


긴 대나무 꼬치에 통통한 비엔나소시지와 쫄깃한 가래떡이 기름을 두르고 노릇하게 구워진 채 번갈아 꽂혀있었다. 소떡소떡은 예전에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개그맨 이영자 때문에 휴게소 음식으로 유명해진 다음부터는 어쩐지 휴게소에만 오면 꼭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핫도그에 작은 주사위 크기로 깍둑썰기를 한 감자가 알알이 박혀 있는 만득이 핫도그도 눈에 띄었다. 처음 나왔을 때 나를 환상적인 맛과 고칼로리 사이에서 엄청 갈등하게 만들었는데. 갈등의 결과는 언제나 핫도그의 승리였다. 노오란 머스터드와 빨간 케첩을 지그재그로 엇갈리게 뿌리고 나서 왕~ 하고 베어 물 때의 행복이란. 인생 뭐 별 거 있나.


네모난 종이상자에 긴 바삭 어포도 맛있겠어. 종잇장처럼 얇은 어포들이 만지면 마치 바짝 마른 낙엽들끼리 부딪히는 것처럼 서걱거릴 것만 같았다. 입 안에서 와사삭 부서질 때의 쾌감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그래도 역시 휴게소에서는 이걸 포기할 수 없지. 나는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는 호두과자 부스로 발길을 돌렸다.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검정 무쇠 틀이  벌어지면서 갓 구운 동글동글한 호두과자가 통으로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입시결과 발표가 있은 뒤 첫 명절인 설 연휴, '명문대 합격생'이라는 타이틀을 꿰어차고 가족들과 같이 시골 할아버지 댁에 내려가던 길이었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 안에는 친척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을 생각에 들뜬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게 울려 퍼졌다.


도중에 들른 휴게소에서 고심하다가 고른 것이 호두과자였다. 갓 구워 뜨끈한 그것을 한 입 깨물고, 혀 위에서 실크처럼 매끈하게 퍼지는 팥소의 단맛과 그 사이로 씹히는 호두알의 고소함을 음미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탁! 하고 풀렸다. 마치 숱 많은 긴 머리를 꽉 쫌매 놓던 머리 방울이 결국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면서 헝클어질 때의 자유로움과 같이.


옆에서 아빠, 엄마의 신나는 목소리는 점점 페이드 아웃되고 내 마음은 반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다시는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시험도, 그것에 삶을 저당 잡히는 일도 없을 거라는 믿음이 들자 평안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었고, 나는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시험들을 통과해야 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휴게소에만 오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호두과자를 산다. 입에 넣고 깨물 때의 그 긴장 풀리는 안도감과 평안함을 되새김질하고 싶어서. 그 사이 휴게소 음식은 다양하게 변모했고, 인기템들도 자리를 바꾸었지만 나의 선택은 여전히 호두과자.


이천 원짜리 호두과자 한 봉지를 "갓 구운 걸로 주세요."라고 신신당부한 끝에 받아 들고, 옆에 있는 투썸 플레이스로 가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달다구리와 아메리카노는 환상의 궁합이지.


한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컵을, 다른 손에는 호두과자 봉지를 들고 휴게소 뒤편으로 돌아가니 눈 앞에 푸른 수평선이 펼쳐졌다. 행담도 휴게소에서는 바다를 볼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구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코 끝이 시리도록 차갑고 청량한 공기. 끝없이 이어진 수면 위로 오후의 햇살이 반짝거린다. 바다는 언제나 옳아. 그리운 과거를 추억하면서 동시에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호두과자를 한 입 깨물고 우물거리다가 커피 한 모금으로 꿀꺽 삼키고 행복감에 젖는다. 과거와 미래 사이, 그 찰나에 존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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