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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Feb 15. 2021

커피도 장비빨

나는 물욕이 없는 편이다. 식도락을 즐기거나 운동을 하는 등 무언가를 경험하고 자기 계발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지만, 물건은 한낱 stuff일 뿐. 가지고 싶다는 욕망도 잘 못 느끼고, 갖게 된 다음 관리도 잘 못해서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물건이 필요할 때에는 대체로 기능에 충실한 최저가의 제품을 고른다.


반대로 남편은 모든 물건의 선택 기준이 디자인이라, 별다른 추가 기능이 없고, 어쩔 땐 오히려 사용하기 더 불편한 것도 디테일한 디자인 차이 하나만으로 최저가의 몇 배가 되는 돈을 쉽게 지불한다.


게다가 수집욕도 꽤 있어서 같은 물건을 여러 버전으로 살 때도 있다. 나는 그런 남편의 취향을 '물건에 집착한다'며 은근히 깔보곤 했다. 나처럼 자기 관리에 힘쓰고, 경험을 쌓아 인생의 지경을 넓혀보란 말이야. 


그런데 남편과 오래 살아서일까, 나이 들면서 취향이 바뀌는 것일까. 언젠가부터 예전에는 그냥 '물건'으로 보이던 것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쁜 물건이 예뻐 보이는 것이다. 


이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닫고 나자, 예전에는 쓸 데 없이 비싼 걸 산다며 남편에게 눈을 흘길만한 상황에서도 잠잠히 한 발 물러서고, 이따금 마음속으로 '음.. 괜찮네.'라고 감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드디어 기능과 최저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커피 드립포트.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지인에게 줄 생일선물을 고르고 있던 중 한 드립포트를 발견했다. 안 그래도 커피 드립을 취미로 시작하면서 필요한 도구 일습을 갖추어야겠다고 맘먹고 있던 중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쿠팡 로켓 배송이 되는 것 중 제일 저렴한 것을 살 생각이었기에 그냥 페이지를 넘겼는데, 자꾸만 그 드립포트가 눈에 밟혔다. 블랙 무광의 메탈 몸체에 우드 손잡이가 멋스러웠고, 얇고 길게 빠진 주둥이(?)가 우아했다.


그래, 남을 위한 선물은 잘도 하면서 나를 위해 고급진 드립포트 하나 못 살 게 뭐 있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에게 선물하기' 버튼을 눌렀을 때, 뭔가 내 삶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만 같은 장엄한 기분까지 들었다. 


배송을 받고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자 기대했던 대로의 물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언박싱이란 말도 은근히 우습게 여겼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과 조우할 때에는 그저 '택배 상자를 뜯었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구나. 정말이지 내가 찾던 (사실은 찾는 줄도 몰랐던) 그 물건이야.


커피 드립에 임하는 나의 마음은 포트를 사기 전과 후로 나뉜다. 앤티크 한 핸드밀(남편이 산 것. 나는 뚜껑도 없는 비실용적인 것이라고 못마땅해했지.)과 나란히 놓고 나니 세상 이런 예쁨이 따로 없다. 핸드밀을 갈 때 피어오르는 커피콩의 향기, 무지갯빛 거품을 내며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커피가루들과 함께 아름다운 포트의 자태는 드립의 시간을 한층 풍요롭게 해 준다.   


여태껏 내가 무시해왔던, 아름다운 물건 수집광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누구에게나 취향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임을, 내 삶의 지경을 넓혀준 것은 편견에 갇힌 자기 계발의 노력보다 오히려 나와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에 대한 열린 마음이라는 것깨달으며, 나는 오늘도 행복한 기분으로 드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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