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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pr 05. 2024

나이 들어서 아프면 어떡해

집에는 남자가 있어야 해

가끔 겁을 준다. 그러면 나도 이따금 겁을 집어먹는다.


'나이 들어서'로 시작하는 가정문에 걸려들면 그간 자유로웠던 내 비혼의 명분이 조금 수그러든다.


나이 들어서 외로우면 어떡해.

나이 들어서 돈 없으면 어떡해.

나이 들어서 돌봐 줄 사람 없으면 어떡해.

나이 들어서 큰일 의논할 사람 없으면 어떡해.

나이 들어서 아프면 어떡해.

 

그러니까,

집에는 남자가 있어야 해.

집에는 사람이 있어야 해.

(저, 저기, 저도 사람이긴 한데요...)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식구들이 외출한 사이에 자기 방 가구를 획기적으로 뒤바꿔 놓곤 했다. 힘이 장사여서가 아니라 요령을 터득해서다. 집에 힘센 사람이 있으면야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다면, 나도 내 동생처럼 '요령'을 터득해 보면 어떨까. 살아가는 데 '물리적인 힘' 말고 '사회적인 요령'이 필요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사실 종종 물리적인 한계를 느끼기는 한다. 어제도 봄맞이 대청소 및 방 정리를 하면서 나 혼자 방 배치를 바꾸려고 큰 책장과 침대를 낑낑거리며 옮겨 보았는데 손발이 저린다. (도저히 힘만으로는 안 되긴 했다.) 나이 들어서는 '이 짓'을 하기 쉽진 않겠군, 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힘을 못 쓴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것들이 '혼자 나이 들지 말아야 명분'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부모님은 이러한 명분에 회의적이시지만...


"밤에 잠이 안 와."

밤에 잠이 안 왔다는 소식을 내게 들려주시던 우리 아버지. 평소 비혼인 나에 관해 전혀 걱정이 없어 보였던 우리 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딸자식 걱정에 뒤척이셨던 것이다. (예전엔 방바닥에 고개만 닿으면 코를 고셨는데...) 엄마는 또 어떠한가. 우리 엄마는 머리에 나를 이고 다니며, '시집 처자가 여기 하나 있어요~~' 하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진담 섞어 우스갯소리를 내뱉곤 하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런 반응으로 보아 나는 '안심 덩어리'가 아닌 '근심 덩어리'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그래도 너(=봄봄=나)가 있어서 이것저것 심부름 다 해 주는데, 나중에 너가 늙으면 누가 이런 걸 다 해 줘?"


부모님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디 나가서 심부름꾼이라도 하나 구해 와야 할 것만 같다. 작게는 드라마 통역사(부모님보다는 청력이 좋은 나)에서부터 크게는 인터넷 뱅킹이나 은행 업무 처리까지. 부모님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심부름꾼이 없을 미래의 나를 걱정하신다. 늙은 나를 돌봐 줄 젊은 누군가를, 아니 같이 늙어가며 함께 잡담이라도 나눌 누군가를 희망하신다.



"나이 들어서 아프면 그게 제일 서러워. 너도 나이 들어서 혼자 아프면 어떡해. 지금은 그나마 젊으니까 괜찮지."

소개팅이나 선을 거절하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직은 안 아프지만 아프게 될까 봐 마음이 움츠러들기도 하고, 나를 향한 걱정임을 알지만 이 문장들이 때로는 겁박으로까지 들리기도 한다. 어디 나가서 결혼할 사람, 아니 간병할 사람이라도 하나 구해 두어야 내 노후가 든든할 것만 같다.


물론 나이 들어서 혼자면 다소 외로울 것이다. 나이 들어서 혼자고 무자식이면 봉양해 줄 사람이 없어 돈이 좀 궁할 수도 있을 테고. 큰일을 혼자서 결정해 나가야 할 수도 있다. 병원에 가서 보호자란에 누구를 적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서'라는 미래 시제에서 지금의 나을 보면 정말 나 같은 사람은 그들의 예언처럼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하지만 비혼의 결말이 '고독사'와 같은 '큰일'이어야만 할까, 과연?



홀몸 노인들을 위한 사회의 서비스는 조금씩 다양해지고 있다. 어떤 지자체에서는 형광등, 수전, 방충망, 문손잡이 등 '잔고장'을 수리해 주는 서비스도 실시한다.(용인시 "홀몸 어르신댁 잔고장 고쳐드려요" - 아시아경제 (asiae.co.kr)) 쭉 싱글인 채로 일흔을 넘기신 우리 엄마의 친구분을 보면, '노인'이라는 말 앞에 '혼자'를 붙인다고 해서 꼭 겁을 먹어야 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분은 홀몸 노인이라는 이유로 이따금 사회복지사의 안부 전화를 받으시지만, 사회적 활동을 왕성히 하신다. 종교 단체의 소모임에도 적극적이시고, 뒤늦게 배운 그림에서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시기도 단다. (요즘엔 '댄스 수업'에도 참여하신다고 들었다!)



비혼이라고 해서 '혼자서 늙어 죽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관계망은 꼭 필요하다. 아예 혼자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현재 '비혼'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라서이다.



나이 들어서 외로우면 어떡해?

나이 들어서 아프면 어떡해?



나이 들어서, 라는 미래 시제에 갇힐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이 질문들에 이번엔 이렇게 대답해 드려야겠다.


나이 들어도 심심하지 않게 살 자신은 있어요. 그리고 그때 가면 간병로봇도 아주 성능이 좋을 거예요. 어쩌면 대화가 잘 통하는 로봇 친구를 만날지도 모르겠고요.


혼자인 저를 못 믿겠다면,

혼자여도 심심하게 안 해 줄 이 사회를, 그리고 엄청나게 발전하고 진보할 이 세상을 한번 믿어 보세요.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걱정해 주셔서 무척 감사드리고요.)



(사진 출처: GDJ@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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