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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pr 12. 2024

미친 척하고 만나 봐

엄마의 실핏줄이 터졌다.


"와, 진짜요? 축하드려요!!"

뒤늦게 엄마의 친척 모임에 합류하여 차를 얻어마시던 날. 며칠 전의 장례식 소식과 몇 달 후의 결혼식 소식이 같은 식탁 위에 뒤섞여 오르던 날. 그날이었다. 축하해야 마땅한 일을 앞에 두고 엄마는 어쩐 일인지 싱숭생숭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끝내 실핏줄까지 터지고 말았다.


"이제 언니는 5월에 시집가니까, 넌 10월에 시집가면 되겠어."

사촌언니1의 말이다.

"우리 아들이랑 진짜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야. 사람이 괜찮아. 게임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가장 좋은 게 뭔지 알아? 토요일과 일요일만 일한대. 평일엔 집에 있대. 평일에 집안일도 도와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사촌언니2의 말이다.


"근데 그게 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왜 주말부부는 신이 내리는 거라잖아요. 평일까지 같이 붙어 있으면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집안일은 공동의 작업이니 서로 돕는 거지 한쪽 사람이 다른 한쪽 사람을 돕는 건 아닌 것 같고..)"


갑자기 '봄책장봄먼지 일병 구하기'가 되어 버린 우리의 티타임.

"안 그래도 네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딱 네가 왔네. 한번 만나 봐. 시어머니 자리도 진짜 괜찮고."

응? 나 시집가? 나 언제 시어머니 생긴 거?



나보다 네 살 위인 언니가 드디어, 혹은 마침내 시집을 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축복을 받고 축하를 받아야 할 일. 결혼에 나이가 어디 있나 싶지만 나 역시 편견을 지닌 터라 그 언니가 갑자기 결혼 소식을 전해 온 것이 놀랍다. 문제는, 나보다 엄마가 더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었다는 .



-엄마 실핏줄 터졌어!! 빨개.

-어디 어디?

-눈동자 왼쪽으로 째려봐 봐. 거기 거기.

-네가 시집 안 간대서 그런가 보다.


엄마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저 문장에 숨은 뜻을 나는 안다. 내가 시집 간대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믿었던(?)' 누군가가 시집을 간대서 그렇다. 오래전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갑내기 친구와 백년가약을 맺기로 했단다.  

 


적진에 홀로 남은 아군을 바라보듯 나를 구하려는 목소리들은 내 폐부를 깊숙이 찔러 댄다.


"억지로 만나는 거, 이제 안 하려고요."

방어1 성공.

"어색해서 싫어요."

방어2 성공.

"가족끼리 서로 잘 아는 사람이 전 더 싫어요."

아주 오래전, 아는 사람들(고모, 사촌오빠)이 사람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나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엮어 줬는데 정말 크게 엮일 뻔했다. 주변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나를 한 번 더 만난 것을 내가 오해하였고, 왜 연락이 없냐고 대뜸 물었다가 혼자 뻥 차인 시원한 흑역사도 있다.

아는 사람이 소개하면 신뢰할 수 있다지만 그게 더 더 불편하다는 걸 이미 깨달아 버렸다.



근데 적진은 어디일까. 나 홀로 남은 이곳일까,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저곳일까. 나에게는 이승과 저승 사이만큼이나 멀어 보이는 간극이다. 게다가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적진인지 아닌지 그들이 어떻게 알지? 이곳에서는 연대할 수 없으리라 여기는 건가?

남편이 남의 편이 될 때도 있다던데 어떻게 가족의 규격, 즉 4인 가족, 3인 가족이 꼭 아군이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지? 정말 그곳은 안전한가? 정말 적진은 아닌가?



"얘가 너무 완고하네."

오늘 무를 너무 많이 잘랐더니 좀 피로하다. 무 자르듯하지 않으면 또 휘둘리다 낯선 남자 앞에 앉아 있기 십상이다.


나도 안다. 사랑을 하면 좋다는 것을. 바라만 보아도 따뜻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나도 살면서 미치도록 누군가를 좋아해 봤고 600통이 넘는 편지를 써서 상대가 질리도록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게 다 부질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에게 귀한 감정들로 남았다. 버리고 싶지 않은 '예쁜 쓰레기' 같은 감정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예쁜 쓰레기만으로 살고 싶진 않다.



물론 이 비혼일지를 때려치우고 사랑에 푹 빠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무언가에 빠지면 앞뒤 재지 않는 성격이다. 예전엔 그래서 더 걱정들을 하셨는데 이젠 절대 그 수렁에 안 빠지겠다고 하니까 더 걱정들이다. 그 걱정의 온도가 따뜻하다는 것도 물론 안다.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치사량에 달하신 것이다.



"미친 척하고 만나 봐."

미친 척?


엄마, 나 안 미쳤어.

그래서 못 만나, 아니 안 만나.


나는 그저,

내 인생에 미치고 싶을 뿐이다.




(사진 출처: GDJ@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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