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Nov 10. 2019

불쏘시개가 된 첫사랑

첫사랑 압박면접 배틀

“영희 씨, 편지 받아 보았어요.”     


우리 가족은 대청소를 하다 말고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다. 실물로 된 편지는 아니다. 어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가상의 편지다. 하지만 분명 재했던 ‘그녀’의 편지다. 아버지, 영희가 누구예요? 영희가 아버지라고요? 자라는 내내 그렇게 불렸다고요? 그럼 아버지를 영희 씨라고 부르던 그 여자는 누구예요? 언제 아셨던 사이셔요? 그게 왜 최근까지 시골집에 있었어요? 집요하게 신문이 계속되다 보니 아버지가 결국 천천히 입을 여신다.



사실 형수님이 불쏘시개로 쓰셨대.



그녀를 불쏘시개로요? 아버지를 영희 씨라 부르던 그녀1(혹은 그녀2)이라는 분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해 전 아버지께서 시골에 내려갔을 때 그녀와 주고받았던 편지는 모조리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이른 나이에 객지로 나오셨고, 고향을 지키던 큰형수님께서 창고에 쌓여 있던 아버지 글들을 불쏘시개로 쓰신 것이다. 그 불쏘시개에는 아버지의 청춘이 있었고, 아버지의 첫사랑도 있었다. 한창 젊은 시절, 우리 아버지를 불타오르게 했던 그녀는 이제 불쏘시개가 되어 불타 없어졌다. 우리 아버지, 아쉬우실까, 시원하실까? 아버지의 속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헐. 아버지 속살 완전 하얘요!”

 목욕을 마치고 나온 러닝 차림의 아버지를 본다. 이마에서부터 딱 목부분까지만 검붉게 타셨다. 아버지의 팔뚝이며 아버지의 종아리는 그렇게 하얄 수가 없다. 남들이 보면 꼭 스타킹 신은 것만 같은 다리, 너무 핏기가 없어 보일 정도로 뽀얗고 하얀 다리, 그게 우리 아버지의 여리디 여린 속살이었다. 아버지의 속살을 이제야 제대로 바라다본다.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여기 또 있구나 싶었다.



아버지의 속살처럼 숨어 있는 이야기가 바로 이 첫사랑 이야기 아닐까? 아버지를 ‘영희 씨’라고 불렀을 그녀를 상상해 본다. 아버지가 불렀을 그녀의 이름은 또 무엇일까. (물론 그녀가 아버지를 짝사랑하여 당신께 편지를 보낸 것이라고 아버지께 들었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는 이제 확인할 길이 전혀 없다.) 아버지 청춘의 그 여린 속살,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았을 그 뜨거웠던 날들의 여리고 여린 속살, 희고 맑았던 그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누구세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갑자기 놀라신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 집 1층 계단에 서 있다. 키가 껑충하니 크다. 다짜고짜 서 있는 이 고등학생, 누굴까.      


'아, 이럴 수가.'     

 눈이 마주친다. 그 애다. 내 친구가 좋아하는 그 남자아이. 그런데 왜 그 남자애가 내 집 앞에 와 있냐고? 내가 인생에서 쓱쓱 지우고 싶은 기억이 하나 있다. 열여덟, 나는 친구의 뒤통수를 때렸다. 변명하자면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밖에 몰랐다. 아니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는...  나는 친구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만 어떤 남자아이와 눈이 맞았다. 맞아서는 안 될, 튀어서는 안 될 스파크였다. 내 청춘의 광풍이 그렇게 엉뚱하게 막을 올렸다.



“우리 ◯◯를 어떻게 만난 건가?”

“이름이 뭔가?언제부터 알고 지냈나?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가? 오늘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나?”


     

아버지는 구태의연한 문장과 날카로운 어조로 내 남자 친구에게 '압박면접'을 실시하셨다. 아버지가 처음 마주쳤을 딸의 남자. 아버지는 그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아직 아기 같고 세상 물정도 모르고 정말 어리바리 그 자체인 첫째 딸이 사귀려는 이 남자. 이거 뭐야? 어디에서 굴러먹다온... 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아버지 턱밑까지 진격해 온 열여덟 살의 적군. 얼마 만나지도 않은 여자 친구의 집 안까지 성큼성큼 들어오려는 이 남자아이. 대체 자네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



난 그때 정도를 걷지 않았다. 친구가 조금씩 좋아하고 있던 남자아이를 내가 먼저 사귀었다. 친구가 그 남자아이를 좋아하는지 정말 몰랐다는 말도, 남자아이가 나를 먼저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사귀었다는 말도 결국은 다 핑계가 되어 버렸다. 당시 열여덟의 나는 뭔가 양심에 찔려 남자 친구에게 헤어지자 했고,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이를 수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집 앞까지 이렇게 그 남자아이가 찾아오고 말았다. 일은 더욱더 커졌고, 그렇게 내 열여덟의 흑역사가 막을 올리고 있었다.(아이고, 그때 누가 나를 좀 뜯어말렸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나쁜 남자애를 사귄 '나쁜 년'이 되었다. 차후에 알고 봤더니 그 남자애는 내 친구의 집 앞에도 저 혼자 찾아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날 내 집 앞에 왔듯이 말이다. (넌 여자 집 찾아가는 게 취미였구나, 아하하하하하) 아무래도 내가 단단히 잘못 걸려든 것 같다. 아버지 속살을 닮아 얼굴이 하얀 편인 나. 얼굴이 하얗지만 않았어도 내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벌겋게 드러나, 내 두근거림을 들키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아마도 처음 나간 신세계에서 멀쩡해 보이는 남자아이(겉모습만 멀쩡)를 보고, 바보 같은 내가 혹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푼수도 하늘을 보며 산다     



아버지는 푼수다.

푼수는 푼수끼리 살아야 한다.

푼수도 사람이다.

푼수가 사는 세상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푼수도 하늘을 보며 산다.

푼수는 아버지 한 사람으로 끝나야 한다.


2009. 4.     





아버지께서 ‘푼수는 한 사람으로 끝나야 한다’고 외치셨건만 나는 어린 시절, 푼수처럼 친구의 친구를 만났다. ‘어떻게 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남자 친구를 사귀었던 거지?’ 부모님은 깜짝 놀라 내게 물으셨다. 사실 그전까지는 집과 학교, 독서실밖에 안 다니던 딸이었다. 친구가 날 연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아무도 안 믿을 변명을 구태여 해 본다. 아니면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 때문이라고 선인들의 속담을 탓해 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실 나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다. 이게 다 아버지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 ‘정도(正道)’를 걷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자다가도 떡이 나오는 게 아버지의 말씀인 걸 열여덟, 그때의 나는 정녕 몰랐다.         




정도에서 벗어났을 때, 다시 정도로 돌아가는 일도 사실 정도(正道)다.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그 친구에게 사죄 섞인 사과를 하였고, 열아홉 해부터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인연을 이십 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우정도 때로는 사랑보다 꽤 묵묵하고 진하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묵묵한 정도(正道)로 향한다.
이것은 아버지가 내게 알려 주신 길이다.     
그래, 정도(正道)로만 살자. 딱 생이 원하는 그 정도(程度)로만.        


(이제는 둘 다 남자 없이 늙어가는 처지가 된 그 친구와 나. 서로 꼴좋다며 웃을 일만 남았다.)



*사진 출처: pixabay

이전 12화 아버지의 동치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