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도 없고 알맹이도 없는, 당신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당신이 짐이 되는 거예요. 철이 들지 않은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철이 드는 걸까.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여름밤이었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간에 친구 D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우리, 그렇게 비정(非情)하게 살지 말자. 우리, 더 이상 비참(悲慘)해지지 말자고. 삼십 년 우정을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버릴 수 있어.
-많이 취했군. 술이 깨면 만나서 얘기하자.
삼십여 분, 휴대폰 배터리가 다 소진되어 통화가 끊어질 때까지,
빗소리에 젖은 그의 주정(酒酊)은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그 친구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었나 봅니다.
나는 배신자였을까. 나는 배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 D와, 또 한 친구 Y. 그들은 나의 소중한, 그리고 가장 막역(莫逆)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은,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그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절교를 선언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줄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미묘한 사안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등을 돌려, 절교를 했습니다.
친구가 좋아, 친구 따라 청산(靑山)에 갔다가, 나는 그만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 친구를 계속 만났고, 그리고 다시 청산에 갔던 그 옛날로 돌아가면 안 되느냐고, 간곡히 얘기를 했습니다. 끝내 그들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술이 깬, 맨 정신일 때, 친구 D를 만났습니다.
나는 왜 내가 <배신자>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도 내가 왜 <배신자>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데면데면한 사이로 시간은 흘러갔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잘 있느냐고, 안부 전화를 했습니다. 그 친구와 대면(對面)하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년 지난 듯싶습니다.
얼마 전,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밤을 새워, 말술을 마시며, 그날, 네가 왜 <배신자>이었는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또다시 가슴에 멍이 들까 봐, 대답을 못했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집사람 말처럼, 줏대가 없어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그런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리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렇게 등을 보이며 떠나도 되는,
그들에게 나는 그런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게 세상인심인 것을…….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철이 들지 않은 내게 죄가 있습니다.
(...)
철이 들지 않은 인생이 더 순수할 수도 있습니다. 변명입니다.
요놈의 세상은, 왜 내게 철드는 법을 말해 주지 않을까.
아버지는 두 다리를 쭉 펴고 주무시지 못했다. 그 당시 그랬다. 땅바닥에 머리만 댔다 하면 코를 곤다고, 평소 어머니는 아버지를 늘 부러워하셨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보통 때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두 다리를 쭉 펴고 자는 일이 쉽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버지의 친구는 내 아버지를 욕함으로써 어쩌면 자기 자신을 욕되게 하였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차이고 엮이고 꺾이고 까였다. 아버지를 뒤흔든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아버지를 최고의 친구라고까지 추어올리던 그들이었다. 타인이 쌓아 준 우정의 평판은 타인들의 소꿉장난 같은 말다툼을 시작으로 가뿐히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그들 사이에서 영락없이 ‘등이 터진 새우’였다. 고래들 싸움에 그만 나가떨어져야 했던 그 새우는 우정을 봉합할 겨를도 없이 배신자라는 낙인이 먼저 찍혔다.
이쪽 친구와 말을 섞으면 저쪽 친구가 눈을 크게 떴고, 저쪽 친구와 걷다 보면 이쪽 친구가 길을 막아서는 격이었다. 그때의 아버지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세 사람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서 각기 다른 이름의 자기 몫을 배당받았다. 중간에 서 있던 아버지는 ‘무력함’이라는 몫을 배당받았고, 갈등의 당사자였던 그 둘은 ‘등 돌림’과 ‘뒤틀린 자존심’이라는 몫을 손에 쥐었다. 그들은 손에 쥔 그 낡은 자존심을 오랜 세월 동안 놓지 않았다. 우정의 무력함에 속수무책 주저앉아야 했던 우리 아버지 가슴속은 까마득히 잊혔다.
아버지에게는 이 친구도 소중하고 저 친구도 소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열 손가락 깨물어 더 안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믿는 친구들이었다. 양쪽의 친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립 지대에서 서성이는 우리 아버지를 다소간 쥐고 흔들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 혼자 흔들린 것인지도 몰랐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기울이지 못하고 시소 같은 우정 싸움에서 내 아버지는 두 팔을 꼿꼿이 벌렸다.두 친구들에게서 같은 거리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까스로 팔을 뻗어 가운뎃점에 자기 자신을 놓느라 아버지는 당신 혼자 흔들린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계속 흔들리듯 살아오셨다.
아버지의 '흔들림'은 어쩌면 유전병이었다. 그 유전이 하필 나에게서 발병하였다. 사실 나도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양쪽의 손을 모두 놓아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대학교 시절, 휴학을 한 친구가 잠시 학교로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그녀의 태도와 말투를 지적했다. 조금씩 그녀의 휴학 전 행동들이 도마에 올랐다. 어떤 친구는 그녀가 ‘누구야’라고 다정히 불러 준 적 없이 늘 ‘하○○!’라는 식으로 늘 성을 붙여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만행’ 아닌 만행이 있었다고도 지적했다. 나에게 그녀는 밥을 덜어 주고 정을 덜어 주고 우정을 내어 주는 친구였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나 따뜻한 밥 한 끼, 우정이 담긴 말과 행동을 종종 건너뛰었다고 했다. 나를 뺀 다른 친구들 몇몇은 어찌나 무안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어리석었다. 세월이 지난 후, 나는 그 친구의 결혼식에 홀로 참석해야 했다. 늘 어울려 다니던 정예 멤버들이었지만 우리 우정은 ‘해체 선언’ 없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세상에서 잊혔다. 그녀는 우리 무리에서 탈퇴 아닌 탈퇴를 했다. 우정을 단단히 채울 틈 없이 3~4년 만에 우리의 우정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작게나마 남아 있는 우정의 명맥을 두세 명이 모여 앉아 ‘그땐 그랬지’ 혹은 ‘그땐 왜 그랬을까’라는 심정을 밝히며 지난날의 ‘철들지 않음’을 우리 스스로 나무라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뒤늦게 자라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오고서야 나머지 사람들은 ‘후회’라는 소회를 밝혔다.
“또 거꾸러져서 잤냐? 어떻게 너는 잠 한 번을 제대로 자질 않냐?”
자식이 늙는 만큼 부모의 잔소리도 점점 나이가 든다. 더 여문 잔소리로 아버지가 나의 잠버릇을 나무란다. 나는 어제도 그제도 이불을 제대로 펴지 않고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불은 켜져 있고 내 몸은 반쯤 접힌 채로 아침을 맞았다. 새벽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그렇게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잠든 나를 보시고 아버지는 또 한마디를 꺼내셨다.
“또, 또, 또 이불도 안 덮고 아무 데서나 그냥 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람 자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앞날을 알 수 있다고 하신다. 나는 웅크리거나 거꾸러진 자세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이 들곤 했는데 부모님의 ‘잠자는 모습=앞날’ 이론에 따른다면 내 미래는 제대로 굴러갈팔자는 아니다.
“다리 좀 쭉 펴고 반듯이 자라니까.”
그만하면 다 알아들었을 말이다. 그런데 네 살 때나 마흔 살 때나 부모님의 잔소리는 도돌이표다. 잔소리하는 재미라도 있으시라고 오늘도 나는 두 다리를 쭉 펴지 않은 채 내 방 어느 한 구석 귀퉁이쯤에서 잠이 든다. 참, 그런데, 아버지,
그러는 아버지는 언제나 두 다리를 쭉 펴고 주무시나요?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시다. 대답 대신 방안으로 쏙 들어가 조용히 친구의 책을 읽으신다. (두 친구는 모두 책을 쓰셨는데 그중 한 친구 분은 수필가로도 등단하셨고 최근에 새로이 책도 출간하셨다.) 친구의 책에서 ‘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는 우리 아버지는, ‘원’이 먼저 찾아와 주었으면 한다는 친구의 페이지를 읽고 또 읽는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굵게 접힌 그 페이지. 언제라도 다시 펼칠 수 있도록 접혀 있는 페이지지만, 그러나 내 아버지.. 늘 그 자리에서 더는 진도를 나아가지 못하신다.
아버지는 아직 다음 책장을 못 넘기고 계신다. "나는 또다시 가슴에 멍이 들까 봐, 대답을 못했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친구 분의 우정은 아직도 그때 그 페이지에만 머무르고 있다. 아버지도 나도 여전히 두 다리를 쭉 펴지 못한 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