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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ul 13. 2024

덤벙력이 +1 증가하였습니다만

며칠 전 미용실에 '뿌리 염색'을 예약해 두었다. 아직 흰머리가 무덤처럼 무성해진 것도 아닌데 서둘러 예약을 잡았던 이유는.. 사진이 찍힌 채 어딘가로 내 모습이 돌아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인플루언서 자녀분 체험은 잠정 연기되었어요."


그러나 체험관 에어컨이 고장 났고 에어컨 성수기라 조속한 수리도 어렵다고 한다. 안 온다고? 자연스레 내 얼굴이 sns에 돌아다니는 상황이 미뤄졌다. 그런데.. 염색.. 이미 예약 다 했는데.. 당일에 들은 소식이라 여하튼 계획대로 늦은 오후에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어렵게 해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나는 일기장에 '끝나고 나면 할 일들' 목록을 적곤 한다. 거기에는 '라면 먹기'도 있고 '방 치우기'도 있고 '달리기하기'도 있다. 이번 목록은 '강의 끝나고 늦은 저녁에 1km라도 달리기'였다. 그런데 가만.. 염색하고 드라이 예쁘게 다 하고 오후에 달리기? 


생각해 보니 아니 될 말이었다. 나는 가운뎃줄을 깊이 그었다.


저녁에 1km라도 달리기


안 돼, 안 돼. 뛰면 땀 나. 



오전에 큰일을 마치고 어무니를 잠시 만나 점심을 먹으며 이 소소한 '염색 후 달리지 않기' 다짐한다. (누구에게라도 알려야 안 까먹는다.) 


"(엄마 왈) 그래, 오늘은 뛰면 안 되지. 드라이까지 예쁘게 다 해 주는데."

"그치?"

"그리고 버스 타."

"응?"

"전철역에서 내려서 미용실까지 버스 타라고. 왔다 갔다 할 때 모두."

"두 정거장인데?"

"그래도. 땀 나."

"맞다. 땀 나. 걸으면 땀 나."

"머리 예쁘게 하고 어디라도 나가야겠네."

"그런가?"

"그래. 그 머리 그대로 내일 어디라도 돌아다녀야겠네."

"그러게. 미용실 드라이 머리는 그래도 예쁘니까? (얼굴이 안 도와주지만 머리는 썩 괜찮으니까?)"


나는 곱게 드라이를 한 머리, 흰머리가 사라진 머리로 어디 마트라도 가야 하나, 없던 주말 약속을 스스로 만들 판이다. (그리고 미용실을 자주 안 가는 사람인지라, 미용실 머리는 내게 '소듕'하다.)



나의 다짐대로 어무니의 조언대로 '땀 나지 않은', 그리고 '예전 미스코리아 같은 드라이 머리'를 하고서 집에 돌아왔다. 아침엔 돌발 변수가 많았던 지라 하루가 다 피곤하다. 

'아, 오늘 너무 번잡한 일이 많았어. 멘털 나갈 뻔... 우당탕탕 체험 진행했지, 회의했지, 옛날 동네 가서 미용실 갔지..'


"빨래 돌리게 얼른 샤워하지 그래?"

"어? 샤워?"

딴생각 중인데 샤워 제안이 급히 들어온다. 

"알았어."

나는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두 발을 욕실로 디민다. 

솨아아아아.


샤워기 물이 온몸에 떨어지고 나는 머리칼 곳곳에 세차게 물을 들이붓는다. 

'아, 시원하다. 샴푸 향도 좋고...'


음... 아... 아!! 맞다!!!!


아, 맞다! 두 시간 전쯤 미용실에서 감아 준 머리였는데!

아, 맞다! 염색물 빠지면 안 되는데!

아, 맞다. 땀 안 흘리고 이 머리 유지하려고 계속 버스 타고 다녔는데!

아, 맞다.  예쁘게 드라이한 머리였는데!!!


아, 맞다... 


오늘도 소소한 '아, 맞다'의 행렬.



"엄마, 나 머리 또 감았어."

"아, 그러네."

"머리 아깝다."

"그래도 아까 그 머리로 미용실에서 집까지 오긴 했잖아."

"그, 그러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나의 고운 머리는 2시간 만에 사라졌다. 하긴 딱히 누구에게 보여 줄 사람도 없다. 뭐, 이번에도 내가 봤으니 그걸로 끝..! 아무튼.. 오늘도..



덤벙력이 +1 증가된다. 

정말로 나는 나를 결코 실망시키지를 않는다.



(사진: Baylee Gramling@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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