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우연의 총합으로 사건이 일어나며, 전조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빌드업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 빌드업들을 따라가 보자면...
동생네서 조카들과 신나게 뒹굴뒹굴 놀다가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어깨 옆으로 아주 작은 가방을 메고 빈 쇼핑백 하나만 달랑 든 채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쇼핑백은 마트용 쇼핑백이었고 그 당시 엄마가 자주 애용하던 쇼핑백이었다. 그 안에는 조금 두툼한 여행용 티슈 하나만이 들어 있었다.
'어! 버스다.'
집까지 곧장 가는 버스는 그것 하나였기에 나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물론 팔목에 쇼핑백 고리를 단단히(?) 채운 상태였으므로 나의 덤벙이 침입할 틈이란 전혀 없어 보였다.
"어? 어, 어!"
버스가 육교를 지나 한 개의 정류장을 지나쳤을 때. 무심코 팔을 들다가 너무나도 가벼운 느낌이 들어 내 팔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뭐, 뭐지... 아! 쇼핑백!
그저 쇼핑백일 뿐이었고 휴지 하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 그냥 동생한테 가져가 달라고 해 버릴까, 아니야,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하니까 번거로울 거야, 애들만 두고 집에서 나오기도 좀 그렇고....'
찰나의 순간에도 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벨을 누르고 있었다. 머리 굴리는 일은 그만두고 우직한 방식으로 내 덤벙의 발자국을 스스로 되짚으며 사건을 해결하기로 한 것.
'아니 근데 그게 어떻게 내 팔목에서 없어진 거야?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추론해 보자.
1. 혹시 버스 정류장에 흘렸나? (가장 그럴듯한 추론)
2. 혹시 처음부터 동생 집에서 안 가져왔던 것일까? (가장 생각하기 싫은 어이없는 추론)
3. 설마 내가 방금 내린 저 버스, 거기에 떨어트린 것일까? 서..설마? 나, 지금 그것도 모르고 내린 거? (스스로 똥개훈련을 하며 쇼핑백도 못 찾을 최악의 결론)
4. 그런데, 나... 겨우 쇼핑백 하나 때문에 은근 먼 이 거리를 다시 걸어가야 하는 거냐, 지금? 실화냐, 이거?
터덜터덜 도착한 버스 정류장.
'아... 역시.. 결국..'
차도와 인도 사이.. 연석에 나의 노란 쇼핑백이 고운 자태 및 매우 점잖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아니, 나자빠진 모습이었달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팔목에 분명 끼웠었는데?'
여하튼 버스를 다시 기다리고 시간을 길바닥에 살뜰히 허비한 후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무용담을 한껏 늘어놓고... 그러고 나서 채 보름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이 쇼핑백은, 우리 큰딸내미 것이 확~실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우정의 무대>에서 군인들이 외치는 듯한 목소리로.. (연식 나오는 '우정의 무대' 언급...)
엄마의 놀림과 조롱에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이번 사건은 앞선 사건과 매우 유사한 '수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전말은 이렇다.
이번 쇼핑백은 독립출판물 북페어에서 받은 부직포 쇼핑백. 성당 가는 길에 도서관 책들을 반납하려고 이용한 쇼핑백. 엄마, 아부지보다 더 먼저 집을 나섰다가 책을 반납한 후 성당에 도착하고 보니 미스터리하게도 또 한 번 더 내 팔목에서 없어졌던 그 쇼핑백...
"아니, 내가 어제 너 독립출판물 잔치인가 하는 데 놀러 갔었잖아. 안 그랬으면 길바닥에 나뒹구는 이 하얀 쇼핑백을 봐도 뭔지 몰랐을 거야. 근데 바로 어제 본 쇼핑백이잖아. 그래도 혹~시나 네 것이 아닐 수도 있어서 그 안을 살펴봤더니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바닥에! 딱 하나! 네가 평소 즐겨 먹는 호올스 껍질이 들어 있는 거야! 그래서 알았지!"
허허. (우리 엄니) 참으로 명탐정일세. 아무튼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라는 '천국의 계단(드라마)' 권상우 대사처럼 나의 사물들은 나의 덤벙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오기 위한 여정을 좀체 멈추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런 '쇼핑백 사건'이 두 차례나 일어난 후에도 난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그 쇼핑백이고 저 쇼핑백이고 간에 어떻게 손목에 딱! 끼워 둔 쇼핑백이 바닥으로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위에 덧붙인 글에 나온 바와 같이) 우리 둘째 조카가 차에 올라타면서 가벼운 에코백을 툭 떨어트렸다. 그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팔꿈치가 순간적으로 팔 옆에 착 붙어 아래를 향하자, 팔 전체가 일자 모양이 되었고 그 순간 중력의 법칙에 따라 에코백이 스르르 낙하했다. 가방의 고리보다 손이 더 작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워낙 가벼운 무게인지라 가방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전혀 없었고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기에 가방의 탈출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 아, 내가 저랬겠구나!
"어머! 호니를 보니까, 이모가 어떻게 덤벙거렸는지 확실히 알겠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동생이 부랴부랴 차문을 닫고 내 입단속을 서두른다. '조용조용'을 종용한다. 이모의 덤벙 DNA가 자기 자식에게로 갔을까 봐, 말이 씨가 되고 열매가 될까 봐 아주 난색을 표한다.
어쨌든 나의 '쇼핑백 덤벙 낙하 사건'의 미스터리는 우리 조카 덕에 유쾌히 풀렸다! 고마워, 우리 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