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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ug 30. 2024

끝나지 않을 에필로그

-얼마나 컸는지 사진 좀 봐 봐!


친구들은 서로 자기 자식이 얼마나 컸는지 사진을 통해 확인한다. 직접 만나서건 단체 채팅방에서건 이런 상황들은 곧잘 목격되는 상황이다. 아이들이 어릴수록 더더욱 그렇다. 친구들은 성장의 한 뼘 한 뼘을 확인하며 서로 정다운 미소를 나누어 갖는다.


물론 이 미소의 나눗셈에서 내 몫은 없다. 당연하다. 나는 이 몫을 위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는 함부로 사진을 올릴 수도 없는 처지이다. 내 조카들 사진을 자랑하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카톡 프로필에 무심코 올렸다가 조카들 어미로부터 필터 처리 좀 하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고, 그 뒤로 직접 조카들에게 허락을 맡고 올리려 했는데, 조카들은 뒷모습조차 '초상권'을 이유로 허락을 해 주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 휴대폰에서 조카들 사진이 없어진 지 오래이기도 하다.)


그래도 친구들 앞에서 나도 여보란 듯이 보여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몸 바쳐 마음 바쳐 조카육아에 매달리고 헌신했던 흔적과 그 깊은 사랑을 책 한 권으로 써낸 적까지 있으므로 그 281페이지 분량의 사랑을 눈앞에서 증명해 낼 수도 있으리라 자부한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아닌 다른 이를 자랑하는 일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친구들의 식탁으로 돌아가 본다. 친구들은 사춘기 자식을 둔 고민을 앞다투어 쏟아내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난 뒷이야기를 우리의 식탁에 올려놓기도 한다. 남매나 형제, 자매끼리 싸웠다가 친해졌다가 다시 싸우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은 가장 많이 듣는 '남 자식' 이야기 베스트 파이브이기도 하다.


-어머, 너무 우리 이야기만 했지?

그러다 친구가 나를 돌아보며 여느 때처럼 말한다.


 -응? 아냐.

정정해 주고 싶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어느 이야기가 식탁에 오르든 이야기는 시간을 때워 주는 좋은 재료이자 연료이니까. 그래도 굳이 정정을 하자면... 우선 위의 문장은 목적어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너무 '우리' 이야기만 했지?

-아니, 그 문장은 이렇게 바꿔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식' 이야기만 했지?" 이렇게 말이야. 난 너희의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어. 너희 '자식' 이야기는 제법 들은 것 같지만.



살아가며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 소스보다 타인에 관한 이야기 소스를 늘려간다. 대놓고 자랑하기에는 너무 어른이 되었고, 대놓고 고민하기에도 이미 어린 시절을 훌쩍 지나왔다. 그래서인지 저래서인지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 소스들을 점점 잃는다. 잃다 보면 우리의 목소리는 타인의 삶을 전하는 통로로 쓰인다. 그러다 결국 그 통로가 '나'의 이야기를 들여보내고 내보내는 통로였음을 점점 잊게 된다.



나?

나는 이야기 소스로 현재 '비혼을 때리는 말들'을 택했다. 여전히 타인의 삶이나 목소리에 휘둘리며 살아가긴 하지만 더는 내 통로에 다른 이야기를 채우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목소리 통로에 누구의 이야기를 내려놓든 그것은 자유다.

다만 나는 끝나지 않을 에필로그들을 쓰며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에 담고 싶다.


가끔은 '너무 우리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우리이길 바라며,

때때로 '나의 이야기'에 몸서리칠 정도로 환희를 느끼는 나의 친구들이길 바라며...



나의 에필로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비혼을 때리는 말들'의 에필로그도 현재 진행형이다.




(사진 출처: taichi nakamura@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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