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불안 한 톨을 보고도 놀란다. 움찔거리는 마음은 호흡이나 명상 등의 솥뚜껑으로도 덮어 두기 힘들다. 오늘이 조금 그런 날이다.
-내일 대면 수업에 필요한 파일,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이런 문자를 올리며 다시 심호흡을 해 본다. 모르는 아이들을 만나서 그들 앞에서 원맨쇼를 하듯 우리말 전시관을 안내하고 체험을 권하고 그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우리말'이라는 전체 공연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 일단 막이 오르면 자의든 타의든 나는 말문이 트여야 하고, 마주 보는 아이들의 말문도 트이게끔 부추겨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아는데도 가끔씩 가슴 밑바닥에서 까끌거리는 '불안 한 톨'들이 올라올 때가 있다.
-매번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어떻게 단시간 내 좋은 공연(수업)을 만들 수가 있겠어?
-내일 너는 '남자 청소년들'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그 시커먼 장정들의 장난기나 뚱한 무기력함 등을 네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
-아이들 앞에서 쇼를 하는 너는 진짜 네가 아니잖아. 너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서 글자 고치는 일에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들과 친한 척을 하는 것, 그건 네가 아니라고.
-네가 조금만 삐끗해도 지켜보던 사람들이 체험 후에 너를 호되게 평가할 거야.
이런 불안을 한 톨 한 톨 모으다 보면 어느새 그 불안의 낱알들은 불안의 밑바닥 심해에 내려와 불안의 이불을 차곡차곡 덮다가 축축한 우울이 내려준 그 습기를 통해 싹을 틔울 준비를 한다. 기어이 싹이 트고 떡잎이 돋아나면, "거봐. 내가 뭐랬어? 이렇게 될 거라고 이미 말했잖아." 불안 한 톨이 준 '불안 예언'을 여봐란듯이 확인하고서 나의 불안을 정당화해 버린다.
불안 에너지에도 총량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에잇, 불안 지겨워.
이런 마음으로 당당히 그를 지겨워할 수만 있다면. 불안 한 톨이 한 가마니의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기 전에,
-에잇, 내가 생각해도 이건 오버네. 이런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어, 설마?
이렇게 자기 합리화라도 해서 나의 '불안 에너지'를 상쇄하는 순간이, 그 불안의 변곡점이 와 준다면 참 좋을 텐데...
오늘도 나는 불안 한 톨을 천둥소리로 오인하며 이 오후를 통째로 뒤흔든다.
하지만 불현듯 내다본 오후의 창밖은 말이 없고 내 안의 불안도, 여전히 말이 없다.
부디, 내가 오독한 불안 한 톨들이 경로를 이탈하기를,
오늘의 이 불안 한 톨과의 조우가,
내일만큼은 조금 더 선선한 평온과 맞닿을 수 있기를,
고개 숙여 불안 한 톨 한 톨 들을 다시 주우며,
조금쯤, 불안의 새로운 미래를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