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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by 봄책장봄먼지 Jan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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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를 기점으로 무인점포가 늘었다. 늘어난 무인 기기의 수도 압도적이다. 디지털에 둔감했던 나조차 무인 단말기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나날이었다. 그래도 한두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진다. 사람에게 직접 주문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도 든다.


입력 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문제가 좀 다르다. 영수증 바코드나 주민 번호를 입력하여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 아직 무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 앉아서 멀찍이 지켜보니 열 명 가운데 두세 명쯤은 입력 시간이 초과된다. 그들은 제때에 누르지 못하여 조금 당황한다. 헤매는 사람 뒤로는 줄이 살짝 늘어나기도 한다. 어깨 너머로 사람들의 여러 시선이 들이닥친다. 무엇을 바코드에 가져다 대어야 하는지, 또 바코드와 바코드 리더기 사이의 거리는 어디쯤이어야 하는지. 세세한 것들을 가늠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슬쩍 옆으로 다가간다. "여기다 진료 영수증 찍으시면 돼요."

그렇다. 이곳은 바로 병원이다, 대학종합병원.


도착 알림 → 키/몸무게 측정 → 혈압 측정


총 3단계를 거쳐야 한다. 창구 앞에 모여들던 예전 풍경은 사라졌다. 이젠 간호사를 통하지 않고도 바로 '진료 대기' 순서를 확인한다. ○○○ 님! 자기 이름이 불리면 바로 진료실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늙은 아이는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를 모시고 3~4개월에 한 번씩 이 병원을 방문한다. 늙은 아이도 일단 이들(여든 오빠, 요리 언니)에게는 '아이'이긴 하므로 여든 오빠보다야 무인 기기에 덜 취약한 편이다.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를 대신하여 늙은 아이는 손과 발이 되어 드리고 디지털 도우미가 되어 드린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증. 늙은 아이가 혹시 병원에 같이 못 오는 날일 땐 어떻게 해야 하지?


한번 가르쳐 줘 봐라.


여든 오빠가 때마침 이런 요청을 한다. 늙은 아이는 진료 기록지 바코드를 무인 기기에 가까이 대는 일과 바코드 거리를 조정하는 일, 본인이 맞냐는 메시지에 먼저 확인을 누른 뒤 측정을 시작해야 하는 일 등을 꼼꼼히 설명한다. 그리 어렵지는 않아서 여든 오빠나 요리 언니 모두 몇 번 해 보고는 금세 손에 익힌다.


별거 아니네?


무인 기기가 마구잡이로 생기고 세상이 '강제'로 변하니 어른들도 '강제'로 적응해 나간다. '별것'들을 '별것 아닌 일'들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럴 때 보면 세상은 우리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가 변했으니 너희는 알아서 변해. 일일이 설명해 주고 천천히 기다려 주지는 않을 거야. 잘해 봐. 행운을 빈다.>


그래, 적응해야 한다. 이것 병원도 처음엔 안내하는 사람이 기기 앞에 늘 서 있었지만 반년이 지나니 그들도 사라졌다. 이젠 스스로 무조건 따라가야만 한다.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모르면 길 가던 사람을 물어서라도 따라가야 한다.


"학생, 저기, 내가 지금 전화가 안 되는데, 뭐 비행기 모드인가 하는 것 때문에 통화 자체가 안 된다고 안내가 나오더라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여든 오빠는 요리 언니와 밖에서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전화가 되지 않아 당황한다. 하지만 평소 질문을 좋아하는 여든 오빠다.  (새로운 기기에 곧잘 호기심을 보이는 여든 오빠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통화가 된 거여요?"

"아, 전철역에서 아무 학생이나 붙잡고 물어봤지. 그 남학생이 스마트폰 맨 위를 훅 당기더니 여기 이 표시를 누르라고, 이 비행기 모드라는 걸 해제하면 된다고. 그 학생이 해 줘서 통화가 된 거야."

"아하 ㅎㅎㅎ"

비행기 상태에 관해 늙은 아이는 여든 오빠에게 몇 번에 걸쳐 강습을 해 드렸다. 그러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능이라 여든 오빠는 곧 잊어버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식(혹은 젊은 사람)과 늘 함께 지낼 수 없는 어른들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물론 인터넷과 챗 GPT가 있다지만.) 하나 더. 자식이 없는  같은 사람도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까?


병원에 앉아 '입력 시간이 초과된 그들'을 보면서 '그들'이 미래의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로봇, open AI, 코딩... 알쏭달쏭한 말들이 늙은 아이의 아날로그 세계를 침범한다. 침략당한 아날로그 세상은 금세 디지털 세계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만다. 늙은 아이는 침범된 아날로그 세상을 다시 재건할 수 있을까? 입력 시간 내 입력하지 않으면 늙은 아이와 여든 오빠, 요리 언니의 세상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다. 달리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날로그 세상은 침범당한 것이 아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 세상을 '확장'하러 온 구원자이다. (영화 대사처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뭐 이런 걸까?)



"야야, 텔레비전이 또 안 나온다, 와서 이것 좀 해 봐라."


인터넷 연결 문제로 여든 오빠의 TV는 오늘도 켜지지를 않는다. 그럼 늙은 아이는 얼른 달려가 미니 셋톱박스를 껐다 켜면서 빨간불에서 하얀 불, 초록불로 바뀔 때까지 이것저것을 움직여 본다. 꼬인 전선을 괜히 괴롭히며 전선으로 줄넘기를 해 보기도 한다. 외부입력, HDMI 선택, 그리고 마침내 연결.


드디어 어쨌든 어떻게 해서라도 TV가 켜지긴 켜진다.

우리의 디지털 해독력도 결국엔 어쨌거나 어떻게든 켜지긴 켜질 것이다.


디지털에 좀 취약해도 좋다.

입력 시간이 초과되어도 좋다.

언젠가는 입력을 할 테니까.


설령 입력을 못 한다 해도 괜찮다. 리에겐 아직 아날로그식 해결법이 있다.

"저기요, 이거 바코드가 잘 안 되는데요?"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인간에게든 로봇에게든 무엇이든 물어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우리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초과된 입력 시간 함께 나누며

같이 늙어 가 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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