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와 재기 넘치는 이 한줄 패러디 문구는 오늘 내가 올린 SNS 살림피드에 달린 어떤 이의 댓글이었다. 그가 농 치듯 던지고 갔을 이 한 마디 말을 나는 마음에 담아두고 몇 번이고 곱씹었는지 모른다. 창밖 자유와 주어진 생활의 의무 사이에서 고뇌하는 현실 주부의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찬란하고 눈부신 봄날 산처럼 거대하게 쌓인 집안일을 눈앞에 두고 미련 없이 제 몸을 내뺄 수 있는 주부라면 둘 중 하나다. 그는 선천적으로 담력을 타고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순간만큼은 '에라이 모르겠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거나.
한때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들 사이에서 '뫼비우스의 감기'란 표현이 유행처럼 나돈 적이 있었다. 아이들 감기가 끝이 없는 상황을 빗댄, 아이 둔 이의 절망적인 마음을 여실히 드러낸 말이었다. 나는 집안일의 속성이 이에 못지 않다 생각했다.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고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결코 매듭지어지지 않는 일. 적어도 내게 있어 살림이란 간절히 바라고 바라나 끝내 이르지 못할 어떤 이상향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하루치 집안일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할 필요가 바로 이 집안일의 '끝없는' 속성에서 기인하는 건지 모른다.
햇마늘을 채반에 쪼개 말리며
그러나 아무리 헤어나오고 싶은 집안일이라도 예외의 날이 있다. 햇살이 기분 좋게 집안으로 들이치는 날엔 마음이 누그러진다. 계산적이기만 하던 마음이 슬며시 경계를 푼다. 뫼비우스의 살림, 돌고 도는 그 끝없는 순환의 세계로 선선히 빨려들어간다. 오래 묵혀 두었던 살림을 들쑤시고 계획에도 없던 일을 벌이기 시작하는 건 여지없이 그런 날이다.
언제부턴가 '볕이 논다'는 표현을 좋아하게 되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리쬐며 좋은 것을 거저 주는 볕의 이로운 속성이 가슴에 따사롭게 와 감긴다. 나에게 볕은 '기분 좋은 에너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 좋은 볕이 혼자 놀다 가도록 버려둘 수 있나. 그대로 손 털고 집을 나서기에는 꽤나 많은 미련이 남는데. '노는' 볕을 잘만 활용하면 많은 일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은 나름 오랜 시간 살림을 돌보며 터득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살림의 노하우와 같은 것이다.(하물며 긴 장마를 앞둔 이 굽굽한 날에, 아침부터 기세등등하게 밀고들어온 햇살이라니. 이만하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그 귀하신 존재가 내뿜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그날 하루의 일정과 움직임이 전면 수정된다.)
나는 우리 집에 들른 햇빛을 버선발로 나가 마중하기 시작했다. 굽굽한 이불을 환한 햇살 아래 탁탁 털어 널고 아직 자줏빛이 선명한 햇마늘도 쪽쪽 쪼개 펼쳤다. 아직 텁텁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커피찌끼를 고슬하게 말릴 수 있는 기회도 바로 이때다. 신발도 한두 켤레 부러 내어 빤다. 예정에 없던 세탁기도 한두 번 더 돌린다. 세탁물 가운데 우선순위는 속옷과 아이들 옷가지다. 햇빛에 바짝 구워진 섬유에서 나는 미더운 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그러고도 노는 볕이 못내 아쉬워 뭐 더 내어 말릴 게 없나 작은 살림살이를 굽어살핀다. 결국 수세미와 샤워타월, 커피 내리는 용도의 삼베보자기까지 살알뜰하게 앞 베란다 선반에 내놓는다. 비로소 오늘 할 일을 마쳤다는 생각에 미치면 나도 모르가 입가에 미소가 가득 번진다.
햇볕은 제 할 일을 똑부러지게 해내는 어느 숙련된 살림꾼임이 틀림없다. 똑순이 햇살을 동무 삼아 힘든 줄 모르고 많은 일을 해낸 날이었다. 아니 일을 해냈다기보다는 나의 다정한 살림 벗 햇볕과 원없이 잘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 떠미는 순풍의 힘으로 살림은 두 배속, 작은 우울과 체념, 무기력함 같은 마음 속 눅진한 습기마저 싹다 가신 기분이었다. 이런 날은 정말이지 종일 집구석에틀어박혀 꼼지락거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예고된 긴 장마를 앞둔 탓이었을 게다. 살림 구석구석에 깃든 그날의 볕이 더없이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던 까닭은. 어느 누구의 명언대로 햇빛은 찬란했고 집안일은 넘쳐 났지만 나는 결코 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