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름은 대학동인데
'대학동'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행정동이다. 고시촌이 거대해지면서 고시의 메카 신림 9동은 2008년 9월 ‘대학동’으로 행정동 명칭을 변경했다. 관악구는 신림동의 이름을 ‘대학동’으로 변경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랫동안 ‘신림 9동’으로 불렸던 이곳은
서울대학교가 위치하고 고시원이 밀집된 곳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동네로써,
지역사회 인재를 양성하고 교육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2017년 사법고시의 폐지와 함께 '배움의 동'인 대학동에도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존재의 이유가 분명한 동네, 대학동. 한순간 삶의 좌표를 상실한 수많은 고시생이 동네를 떠나갔다. 그에 따라 고시원과 원룸 공실률이 40%에 달하게 되었다. 서점, 헌책방, 복사집과 같은 골목 상권을 지탱하던 고시관련 업소들도 덩달아 문을 닫았다.
대학동 상권의 급격한 쇠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우려에도 불구, 다행스럽게도 그 저변에서는 나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고시생의 빈자리를 로스쿨 준비생이나 경찰공무원 시험, 각종 자격증 시험 준비생이 메꾸기 시작했다. 사회에 갓 발을 내딛은 사회초년생과 적지 않은 수의 1인 가구도 대학동을 삶의 터전 삼아 흘러 들어왔다. 안정된 생활 물가와 값싼 방, 혼밥하기 좋은 식당이 널려있고, 배달과 포장 문화가 발달한 동네란 게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대학동은 여전히 뜨내기들의 동네일 거라 생각했다. 내 친오빠의 경우처럼 전문자격시험에 몰두하거나, 취업 전선에 서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갓 직장을 잡은 이가 가정을 꾸려 정착하기 전 잠시 머물렀다 가가는 동네. 이도 저도 아닌 내가 대학동과 진한 인연을 맺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연은 이렇다.
아이 손을 잡고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 마디 툭 내던졌다.
“또 오셨어요? 어머니, 비염엔 치료약이 없는 거 아시지요?”
그의 매정한 한마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말았다. 의사는 환아에 대한 치료를 단념한 듯했다. 아이는 만성 비염으로 소아과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리고 있었고, 상태의 호전은 없었다.
아이는 극심한 코막힘으로 밤마다 잠을 설쳤다.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아이가 푹 자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 양방과 한방을 오가며 비염 치료에 열을 올렸지만 헛수고였다.
어쩌면 주거 환경이 근본 원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볕이 안 들고 통풍이 안 돼 종일 눅눅한 노량진의 반지하 전세방, 이곳을 떠야 해결될 문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요전 날 소아과 의사의 무심한 듯 차가운 말이 ‘지금 살던 곳을 당장 뜨라’라는 최후의 통첩으로 들린 게 사실이었다.
우리 부부는 포털 사이트에서 등고선 지도를 펴놓고 최대한 산과 입지가 가까운 주거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남편 회사까지 출퇴근이 용이한지, 편의시설이 인접해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해가 잘 들고 공기만 좋다면야 그까짓 불편쯤 충분히 감내할 의지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대학동을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친오빠가 머물렀던 대학동 윗동네, 산 밑이라 공기 좋고 해 잘 든다던 바로 그 신선계의 존재가 섬광처럼 스쳤다. 그곳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아이는 산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거침없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듯했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은 '왜 하필 이 엄동설한에 이사를 하느냐'라고 물었다.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아이를 몰라 하는 말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시급한 일이 없었다. 결국 2015년 추위로 혹독한 겨울, 우리는 생애 첫 살림집, 노량진 반지하 전세방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이것이 대학동에 늦깍이로 입성하게 된 나름의 사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