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虛飢)란 몹시 굶어 배고픈 느낌이다.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속담이 대변하듯 식전 공복의 중요성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배고픈 느낌은 곧 먹게 될 음식에 대한 설렘을 준다. 익숙한 맛도 새롭게 느끼고 담백한 맛에서도 만족을 알게 한다. 배고픈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러나 마땅히 배고픔을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배고픈 이의 허기를 채워주는 사람이다. 주방 앞에 서는 자, 허기짐 없이 어찌 서둘러 요리할 마음이 날까. 포만감으로 무디어진 감각은 더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맛을 요구하게 마련, 맛에 민감키 어렵고, 창의적 발상과 멀어져 기계적이고 단순한 조리에 그치고 말 지 모를 일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한동안 단 것에 빠져 살았다. 온종일 육아로 힘겨운 씨름을 끝내고 나면 어김없이 몸과 마음에 허기가 몰려들었다. 그것을 달래려 달콤함을 탐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주전부리를 찾았고, 은밀히 야식을 계획하며 아이들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식습관을 길러주려 애를 쓰고 공복의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엄마의 부끄러운 뒤태였다.
요리가 더 이상 즐겁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공복 없는 삶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과연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단박에 벗어날 수 있을까? 미각을 충족시키던 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 예상대로 해묵은 식습관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았다. 일정 시간 공복을 유지하는 일은 단순히 뱃속을 비우는 차원을 넘어 음식에 대한 정신적 욕구를 잠재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허기를 '달랜다’라고 하지 않던가. 울거나 칭얼거리는 아이마냥 허기와 식욕도 달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음식에 대한 욕구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뻥튀기는 하나의 묘책이었다. 뻥튀기에는 이름처럼 ‘뻥(거짓)’이 다분해 쟁반에 소복이 쌓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들었다. 단 게 자꾸 당길 땐 향미 진한 차가 도움이 됐다. 제법 큰 머그에 결명자를 자주 우려냈다. 결명자의 구수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미련 많은 입맛을 정리해주었다. 그마저도 몸의 욕구를 이길 수 없는 날엔 요플레에 좋아하는 과일을 양껏 넣어 먹었다. 그나마 소화 잘 되는 간식이 어디냐고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공복이 주는 느낌에 차차 익숙해져 갔다. 조급함 대신 편안함이 찾아왔다. 자연스레 공복이 삶 전반에 주는 유익을 누리게 되었다.
충분한 공복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은 무엇이 필요한 지를 스스로 깨달았다. 시각적, 혹은 후각적으로 전해지는 음식의 강한 자극조차 힘을 잃었다. ‘호로록, 호로록’ 부드럽게 면발 넘어가는 TV 라면 광고 앞에서도, 옆집 주방 창 틈새로 새어 나오는 삼겹살 냄새의 강렬한 유혹에도 초연해졌다. 그것은 적어도 내 몸이 정말로 요구하는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특정 음식을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몸은 분명한 신호를 보내왔다. 내 경우에는 생리 전후로 종종 미역국과 뜨끈한 호박죽이 생각나곤 했다. 그것은 혈의 배출이 많고 소화기가 약해지는 시기에 철분의 결핍을 막고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몸의 똑똑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입이 즐거워하는 ‘입맛’보다 몸이 원하는 ‘몸맛’을 알게 되면서 몸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 셈이다.
공복감을 즐기게 된 이후로 요리하는 일이 쉽고 즐거워졌다. 허기가 돌기 시작하면 미각이 예민해진다. 냉장고 속 별 볼 일 없는 재료들이 머릿속에서 한순간에 조합되면서 멋진 음식을 만들어낸다. 기특한 생각이 퐁퐁 솟아나는 것이다. 마치 완성된 그림을 염두에 둔 퍼즐 조각들처럼. 덕분에 끼니를 준비할 때마다 굳이 요리책을 들추거나 억지로 메뉴를 짜낼 필요가 없어졌다.
배부른 상태에서는 눈앞의 산해진미가 무미(無味)하지만 허기진 배에는 단출한 밥상도 별미(別味)가 된다. 배고픈 자가 차린 소박한 밥상, 그리고 그것을 받는 또 다른 배고픈 자, 이러한 설정에는 실패가 없다. 그것은 허기가 불러온, 다름 아닌 완벽한 밥상이다.
공복은 음식을 가장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몸을 최적화시키는 과정이다. 선수의 가진 기량을 한껏 발휘하게끔 하는 준비운동과 같은 것. 몸의 모든 감각을 깨워 음식 재료가 지닌 본연의 맛과 풍미를 제대로 음미케 한다. 이런 점에서 공복은 단순한 결핍 상태가 아닌 채움을 위한 준비단계다. 마냥 비움이 아닌 채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위장을 완전히 비운 채 잠자리에 들 때면 기대감이 차오른다. 가볍고 경쾌한 아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복 상태를 인증이라도 하듯 때때로 터지는 방귀소리마저 경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