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여행자에게 이곳의 아침이 좋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침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비즈니스호텔이라 근사하진 않지만 어쨌건 매일 조식을 먹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준비를 하느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깨우고, 식사를 준비하고, 씻기고, 옷을 입혀 등원 차량에 태우는 게 큰 일이었다.
엄마가 해야 하는 일도, 아이들이 해야 하는 일도 없는 미국에서의 아침은 여유롭다. 눈이 떠질 때 일어나 조식을 먹은 뒤 슬슬 옷을 챙겨 입는다. 그리고 햇볕이 좋은 밖으로 나온다. 아이들의 목적지는 보통 정해져 있는데 대부분 놀이터 아니면 도서관이었다. 어떤 날은 놀이터, 어떤 날은 도서관, 시간이 많은 어떤 날은 두 군데를 다 들르기도 했다.
나무 사이로 놀이터가 보이자 아이들이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던진다. 맨발로 온 놀이터를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고 보니 이미 놀고 있는 다른 아이의 발도 맨발이구나. 벤치에 앉아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 놀이터는 한국 놀이터랑 좀 다르구나!’
맨발로 모래밭에서 뛰놀 수 있는 미국 놀이터
첫째 아이는 유독 모래놀이를 좋아했다. 모래놀이를 시작하면 앉은자리에서 2시간은 기본이다. 물도 좋아하지만 모래가 좋아서 바다에 가자고 하는 아이다. 미국 놀이터에는 어디든 모래가 있었다. 아이들은 마음껏 모래를 만지고 놀았다. 두꺼비 집을 지었다가, 소꿉놀이를 했다가, 자기 발 위로 성을 만들었다가, 도로를 만들었다가 한다.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맨발의 모래투성이 아이들을 보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저 모래를 어쩌지?’ 하는 얼굴이다. 깔끔한 남편은 모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래놀이를 한 뒤 몸에 붙어 집으로 들어오는 모래가 정말 싫단다. 한국 놀이터에 모래가 없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도 했다.
나는 여기서 만은 그냥 놀게 두자고 했다. 하지 말라는 얘기는 하지 말자고. 맨발의 아이가 세상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뛰어노는 걸 보고 남편도 눈을 질끈 감는다. 어차피 한국 가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 집에 들어와 씻기려고 보면 기저귀와 팬티 속까지 모래가 들어가 있지만 이때 좀 더 꼼꼼하게 씻기면 그만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모래가 있는 놀이터를 찾기힘들다. 관리가 힘든 데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 아파트에 모래놀이터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에 매트를 깔고 공장에서 만든 가짜 모래를 만지고 논다. 엄마들이 선택한 차선책 이지만 과연 놀이터의 모래놀이보다 더 신이 날지는 잘 모르겠다. 안전면에서도 고무바닥보다 모랫바닥이 더 좋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미국 놀이터, 참나무와 다람쥐가 사는 곳
우리가 자주 가던 놀이터엔 큰 아름드리 참나무가 있었다. 그 옆 공원 이름이 ‘Live oak park’니 참나무가 오죽 많았을까. 나무 밑엔 도토리가 수북하다. 근처에는 다람쥐가 놀이터에서 아이들 놀 듯 돌아다녔다. 처음엔 다람쥐 보는 게 신기했는데 나중엔 그것도 너무 흔한 일이라 보는 둥 마는 둥 할 정도다. 미국에서 2년 간 살다 최근 돌아온 아이 유치원 친구 엄마는 아이가 미국에서 가장 처음 배운 말이 도토리(Acorn)와 다람쥐(Squirrel)였다고 했는데 그 말을 이곳에 와서야 이해한다.
다람쥐와 도토리가 흔한 미국 놀이터.
이곳의 놀이터는 자연 속에 있는 느낌이다. 나무가 많고 근처에 동물도 산다. 도토리는 다람쥐의 것이니 가져가지 말아 달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겠지. 아파트 조경수 사이에 고무바닥으로 만들어진 한국 놀이터가 생각나 마음 한편이 서글퍼진다.
그네가 사라지는 한국 놀이터
틈 나는 대로 주변 놀이터 탐방을 다녔던 우리 가족에게 ‘매지컬 브릿지 놀이터(Magical Bridge Playground)’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호평을 받은 곳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곳 아이들은 종이 박스를 하나씩 들고 다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이 박스를 들고 놀이터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부러운 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첫째 아이는 누군가 놓고 간 종이박스를 구해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언덕을 올랐다.
그 옆에 미끄럼틀이 있지만 아이들에겐 박스를 타고 노는 게 훨씬 재밌나 보다. 오르고 내려오기의 무한반복. 아이는 내려오다 굴러서 울기도 했지만 다음엔 조심히 타겠다며 다시 박스를 들고 언덕길을 올랐다.
종이 박스를 보니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비료포대를 들고 온 동네는 누비던 그런 때가 있었더랬지. 맨발로 뛰어다니고 무릎은 성할 날이 없었다. 아마 지금 아이들이 비료포대를 들고 다니면 어떻게 아이가 비료포대를 만지게 두냐고 난리가 났을 거다.
안전하기만 한건 좋은 걸까? EBS 다큐프라임 ‘놀이터 프로젝트’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안전규정이 오히려 아이들의 모험심과 창의성을 빼앗는다고 조언한다. 유럽에서 놀이터는 단순히 놀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경험하는 장소로,이 곳에선 위험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겨진단다. 다듬어지지 않은 시소, 아이가 혼자 오르기 높아 보이는 미끄럼틀, 더러울 것 같은 모래 등이 놀이터에서 환영받아야 하는 이유다.
한국 놀이터에서는 점점 그네가 사라지는 추세다. 그네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는 데다, 그네를 설치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단다. 도시 아파트의 한 평이 얼마나 비싼지는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도시의 새로 짓는 아파트에선 좀처럼 그네를 찾기가 힘들다.
사대주의자처럼 미국 놀이터 만이 좋다고 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아이들이 노는 도시의 아파트 놀이터는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여기서도 신나게 놀긴 하지만, 가끔 얘기한다. 모래 있는 미국 놀이터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