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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민 Oct 22. 2023

어른이 돼서도 검사를 맡을 줄이야

그런데 그래야 또 안도감이 드는 것이

벌써 웹소설 아카데미 과정이 막바지가 되었다. 이름 있는 웹소설 기성작가들이 와서 특강을 하고, 또 커리큘럼에 따라 새 작품을 기획하면서 마침내 이제 집필 단계까지 들어간 것이다. 웹소설조차 후딱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다른 장르, 예를 들면 드라마처럼 기획의 단계를 철저히 거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든 기둥이 부실하면 나중에 와르르 무너지는 법이었으니까. 기초 공사가 가장 중요했다.


작가에겐 담당 피디라는 존재가 있다. 원고를 써서 보내주면 내용에 대한 피드백도 해주고 이런저런 방향도 제시해 주는 그런 역할이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이런저런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성향이었기에 집필 속도가 남들보다 느렸다. 그렇다고 계속 딴짓만 많이 하는 것은 아니고, 조금은 신중한 편이었다. 오히려 웹소설 첫 작품(이전에 말아먹은 건 잊고)이다 보니까 완성도에 대한 어찌 보면 집착 같은 것이었다. 


피디님, 원고 다음 주에 한꺼번에 보내야 할 것 같아요.


원래는 이번 주까지 1화부터 3화까지의 원고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까지 도저히 기한을 못 맞출 것 같아 카톡으로 위에처럼 보냈다. 저 중에 '한꺼번에'라는 비겁한 단어를 넣은 나였다. '오늘 조금 보내는 것보단 다음 주에 한꺼번에 보내는 게 낫잖아요'라는 교묘한 술수가 담겨있는 것이다. 피디님은 생각보다 쉽게 그러라고 했다. 어쩌면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 말고도 담당해야 할 아카데미 학생들은 많았으니까. 문득 '학생23'이라는 엑스트라라도 된 것 같아 씁쓸해진다.


그런데 '검사'라는 개념 또한 데드라인처럼 고마운 존재다. 피디의 검사와 데드라인이 없다면 내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데드라인이 없다면 무기한 연기될 것이고, 피디의 검사가 없다면 무한정 수정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 비효율적이다. 다른 장르 포함하여 나름 작가로서 몇 년 생활 해봤을 때 깨달은 것은, 수정을 엄청 많이 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초고의 날 것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이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그럴 때 피디가 주는 피드백은 효율적인 지향점이 된다. 검사를 통해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독방에서 나와 숨 쉴 수 있는 것이다. 또, 피드의 검사는 의외의 긍정적인 효과도 준다. '내가 피디가 알아먹게 글을 썼나?'라는 마음에 제3자의 입장에서 글을 또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글의 가독성에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 혼자만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이 되면 안 되니까. 그런 생각 덕분에 글을 쓰면서 '읽기 쉬운 글'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가끔은 피디에게 검사를 맡는다는 것이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선생님한테 숙제 검사 맡는 느낌. '잘 써서 칭찬 받아야지'까지는 아니지만 '피드백 없이 그대로 통과해야지'라는 마음은 드는 것 같다. 


뭔가 작가에게 '검사'는 이중적인 존재인 것 같다. 내 독창적인 작품을 까버리는 꺼림찍한 단계기도 하지만, 또 검사 없이 글을 올리자면 그건 또 뭔가 속이 캥긴다. 작가는 다른 사람의 검사를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타인이 감탄하거나 칭찬을 하면 작가는 춤을 춘다. 마치 고래처럼. 반대로 안 좋은 비평을 듣게 되면 세상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가 돼버린다. 검사는 작가가 그런 큰 기복이 덜 생기게 해주는 일종의 안전장치인 것 같다. 어쨌든 앞으로 꾸준히 글을 써내야만 하니까.


문득 검사를 하는 피디의 입장이 궁금해졌다. 내가 1화에서 3화까지 보내면 한 회당 5,000자니까 총 1.5만 자이다. 그런데 나 혼자만 보내는 것이 아니니, 만약 5명이 3회 분량의 원고를 보냈다 하면 무려 7.5만 자다! 


그걸 하루 만에 언제 다 읽지? 웹소설 피디란 직업이 신기해졌다. 우리가 쓰는 기계라면 그들은 읽는 기계인 것이다. 불현듯 학창 시절 방학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30명이 넘는 일기장을 선생님은 어떻게 다 읽었을까? 정말로 그걸 한장 한장 다 읽었을까? 특별할 것 없는, 기껏해야 초등학생의 하루가 궁금하긴 했을까?


어쩌면 대충 쓴 일기는 선생님은 대충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도 똑바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좋은 쪽'으로 피드백이 없도록 말이다. 피드백이 없다는 건 정말로 무결점인 만큼 좋거나, 아니면 '손 볼 곳이 너무 많아 차마 다 이야기할 수 없다' 두 가지일 테니까. 


검사는 참 오묘하다. 얼른 검사를 통과해 안정감을 느끼고도 싶고, 한 편으론 '니가 뭔데 내 작품에 뭐라고 해!'라는 마음이 들기도 하다. 검사는 받기 싫지만 또 그러자니 불안하고, 검사를 맡고 내 작품을 인정받고 싶기도 하다. 대체 뭐 어쩌라고? 내가 봐도 작가는 참 초등학생인 것 같다. 독립심과 인정욕구가 동시에 솟구친다. 에휴, 얼른 밀린 숙제나 하러 가야겠다.


어른이 되어서도 검사를 맡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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