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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참깨밭

지난한 참깨농사

by 오설자


아버지가 보낸 소포가 왔다. 늘 그렇듯 상자는 바오밥나무처럼 배가 불룩했다. 풀냄새, 흙냄새가 뒤섞인 고향 냄새. 감자와 마늘 사이로 볼록 솟은 검은 비닐봉지에는 참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살살 휘젓다가 한 움큼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서늘한 참깨 알이 사르륵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제 참깨 농사를 그만두셨으니 이게 아버지가 지은 마지막 참깨리라.

그 ‘마지막’을 볶으며 한 알이라도 튈까 봐 조심스레 저었다.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그러나 그건 곧 아버지의 갈옷에서 나던 땀 냄새였다. 아버지의 땀을 볶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바람에 쓰러진 참깨를 일으켜 세우던 지난날들이 어제인 듯 내 시야에 아득히 펼쳐졌다.

참깨 농사는 참 까다롭다. 아기를 돌보듯 손이 많이 갔다. 어린잎이 네댓 개 돋아나면 첫 번째 김을 매 주기 시작해서 깨가 익을 때까지 여남은 번 약을 치고 여러 번 김을 매야 했다. 참깨의 여린 대궁이가 꺾일세라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김을 매곤 하셨다. 큰 바람이 불고 나면 시들시들 위태했고 비가 많이 와도 밑둥치가 노랗게 썩어 애를 태웠다. 바람이 센 제주도에서 병충해에 약한 작물을 가꾼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름 장마를 견뎌냈다고 해서 참깨 농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추수할 때쯤이면 병충해나 바람이 아닌 참깨 도둑까지 지키느라 밭에서 여러 번 밤을 새우기도 하셨다.


그렇게 키운 참깨. 어느 화창한 날을 잡아 잘 익은 것만 베어 한 다발씩 묶고 햇볕이 잘 드는 담벼락에 세웠다.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을 덮었다 열었다 하기를 또 여러 차례. 바람과 햇살에 말라 벌어진 꼬투리 안에 하얀 참깨가 고른 이를 드러내고 하얗게 웃었다.
깨털기를 할 때, 나는 한약이 가득 든 약사발을 나르듯 참깨 단을 날랐다. 아버지는 깨 한 알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털어 모았다. 참깨 모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거꾸로 들고 살살 두들기면 소나기가 쏟아지듯 참깨가 ‘솨아솨아’ 하고 비닐장판 위에 수북이 쌓여 갔다. 하얀 돈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아버지는 깨를 털며 깨 볶는 향기만큼이나 고소한 꿈을 꾸곤 하셨을 것이다. 한여름 햇살에 달궈진 갑바에 엉덩이가 데일 것 같았지만 신명이 났다. 그것으로 송아지도 사고 우리들 학비며 동생의 병원비를 댔다.
태풍의 길목 제주도. 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그리워할 사람도 없으련만. 동네 구멍가게에 들르듯 해마다 태풍은 빠지지 않고 제주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때마다 광포한 힘으로 막 여물기 시작한 참깨를 쓸어버리는 것은 물론 집 몇 채 날려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우리 참깨가 잘 되었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다. 길가에 있던 너른 밭에 여물어가는 참깨 꼬투리가 알알이 탐스러웠다.
“꾀꽃 지고 노리롱하게 익어 갈 때가 젤로 좋지.”
밭을 둘러보고 온 아버지 얼굴에는 참깨 꽃처럼 하얗게 웃음이 피었다. 곧 깨를 수확하면 올해는 꼭 1 등품을 만들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흐뭇해하셨다. 참깨 꽃말처럼 '기대'했다.


때늦은 태풍이 올라왔다. 집이 통째로 뽑혀나갈 듯이 흔들렸다. 문들이 곧 뜯겨나갈 듯 휘어졌다. 급기야는 부모님과 합세하여 사력을 다해 현관문을 붙들었다. 성난 바람이 삽시간에 들이쳐 우리까지 날려버릴 기세였다. 으르렁거리는 바람소리는 이미 우리 혼을 다 앗아가고 말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기나긴 밤이 지난 다음 날. 잔인하도록 고요했다. 오래된 삼나무가 부러져 마당에 드러누웠고, 나뭇잎이며 부러진 가지들이 올레 밖까지 가득했다.
들녘은 더 처참했다. 참깨는 이리저리 꺾이고 쓰러지고 뒤엉켜 성한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망연히 서 계시다가 일일이 참깨를 일으켜 세우고 실한 것만 베었다. 아버지 뒤에서 나도 같이 참깨를 일으켜 세웠다. 한 번 꺾인 것은 다시 세워도 살아나지 않았지만 그냥 둘 수 없었다. 덜 익은 참깨의 비릿한 풋냄새. 아버지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계획이 날아가고 말았다. 참았던 울음이 땀과 뒤범벅이 되어 얼굴을 타고 내렸다.
창고를 넓히고 집 지붕과 벽에 페인트 칠도하고, 감나무 옆에 있던 변소를 뜯어내고 본채에 이어 욕실과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고칠 예정이었다. 우리는 새로 생길 커다란 욕실과 화장실에 부풀어 있었다. 깊은 밤에 변소에 가는 것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태풍은 그런 아버지의 희망을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상심한 아버지 마음은 아랑곳없이 햇빛은 천연덕스럽게 아수라장이 된 참깨 밭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제는 더 이상 참깨 농사를 짓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아버지는 이듬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참깨 농사를 지으셨다. 참깨에 매달리는 아버지를 어린 마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노리롱’하게 익어가는 참깨가 그리 아까웠을까. 수북이 털고 난 참깨가 손가락 사이로 사락사락 흘러내리는 것이 눈에 밟히셨을까.
해마다 태풍은 어김없이 몰려왔다. 돌담을 무너뜨리고 나무도 뿌리째 뽑아버리고 지붕도 날려버렸다. 인정사정없이 들녘을 만신창이로 짓밟았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쓰러뜨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또 묵묵히 쓰러진 그것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어쩌면 쓰러진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같기도 했다. 태풍이 지난 자리에 다시 씨를 뿌렸고 아버지의 참깨 밭에는 아버지의 꿈처럼 또 하얗게 참깨 꽃이 피었다.

다 볶은 참깨를 작은 병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참깨 꽃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아지랑이 속에서 깨밭을 둘러보며 서 계신 아버지 뒷모습이 가물가물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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